어떤 지역에 쓰나미가 한 번 왔더니, 5,000명이 죽었다. 엄청난 인명손실과 재산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사실 쓰나미만큼 무서운 재난도 없다. 특히 저지대에 평평한 지형에서는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이 조치 하나를 취한다. 인공방파제를 설치한 것이다. 그 후 다시 쓰나미가 또 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무려 50만명이 죽는다. 조사결과 인공방파제가 부실공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렇게 엄청난 사람이 죽었을까. 인공방파제가 설치돼서 이제 과거보다 안전하다고 정부가 홍보하자 더 많은 사람이 해안 가까이 몰려 와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게 누구의 잘못일까. 주민들, 아니면 정부? 잘못은 일차적으로 정부에 있다. 예상할 수 없는 것을 예상하라. 자신들이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정부관계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을 뿐이다.” 2500년 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말은 영원한 진리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한 번 흘러간 강물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궁즉통이라는 말을 들어 봤는가. “궁하면 통한다.” 즉 어려워지면 해결책이 나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렵기만 하면 저절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일까. 원래 이 말에는 가운데 생략된 부분이 있다. “궁즉○ ○즉통”이라는 말인데 그 가운데 ‘○’으로 처리한 글자가 같은 거다. 괄호처리된 글자는 무엇일까. 바로 변화할 때 쓰는 ‘변’이다. 어려워지면 변하고 변하면 해결책이 나온다는 것이다. ‘변화의 책(영어로 하면 the book of change)’인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면 해결책이 나온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해결책을 찾으면 오래간다. 이게 바로 통즉구다. 그래서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변화의 세계관을 주역은 우리에게 제시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가다 보면 다시 궁하게 된다. 구즉궁이다. 이렇게 세상은 순환고리에 갇히면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변화한다. 아무런 패턴도 없이 좌충우돌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패턴에 따라서 변화한다. 이 패턴을 이해하면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방도를 찾을 수 있다.
스스로 혁신하라. 그렇지 않으면 외부에 의해서 혁신당한다.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한 마리 있었다. 그 크기가 몇 천리가 될 정도로 엄청 큰 물고기다. 그런데 이놈이 가만히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집을 점점 더 불리더니, 갑자기 ‘붕(鵬)’이라는 새로 변한다. 붕은 한 번 날았다 하면 9만 리(3만6,000㎞)를 날아간다. 그리고는 한 번을 쉰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참새가 뱁새에게 말한다. “야, 저 붕이라는 새는 참 이상한 놈이다. 왜 9만리씩이나 한 번에 날아가지? 너하고 나하고는 저 옆 나뭇가지에 날아가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2500년 전 중국의 철학자 장자가 소요유(逍遙遊)편에서 말하는 우화다.
왜 곤이라는 물고기는 붕이라는 새로 변했을까. 이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져 보면, 여러 가지 답이 나온다. ‘이전에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등등.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대로 계속될 수는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곤이 물속에서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으며 몸집만 계속 불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먹잇감인 작은 물고기들이 언젠가 다 죽고 나면, 결국에는 곤마저도 굶어 죽을 것이 너무나도 뻔하지 않는가.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항상 벌어진다. 한 번 해결책을 찾았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언젠가 다시 궁해진다. 새로운 세계로 변신해서 날아간 붕처럼 살아라. 혁신을 혁신하라.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