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국민배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국민이 팬이기 때문에 팬클럽도 없고 죽자 살자 저를 좋아하는 분도 못 뵌 것 같고요. 이런 행사를 해 제 나이가 공개가 되는데, 제 나이를 50대 중반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아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이 행사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아요.”(웃음)
배우 안성기(65·사진). 그가 연기한 모든 역할은 우리 시대의 페르소나였으며 한국 영화의 역사 자체다. 지난 1957년 ‘황혼열차(감독 김기영)’의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해 데뷔 60년 주년을 맞은 그를 기념해 한국영상자료원은 오는 28일까지 ‘한국 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展)’을 연다. 13일 개막식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국민배우’라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특유의 여유와 재치를 담아 이같이 대답해 좌중에게 커다란 웃음을 선사했다.
그는 1980년대에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골 출신 덕배, ‘고래사냥’의 민우, ‘칠수와 만수’의 만수까지 당대의 방황하는 청춘으로, 1990년대에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고속 압축 성장의 그늘인 부정부패를 코믹하게 그린 ‘투캅스’ 등으로 우리 사회의 현실을 희극적으로 꼬집는 한편 ‘하얀전쟁’에서는 월남전 악몽에 시달리는 소설가를 연기하며 ‘우리 시대의 상징’으로 존재했다. 또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모든 작품에는 그가 있었다. 130여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그가 꼽은 ‘안성기 베스트 5’에 대해서도 고심 끝에 대답을 내놓았다. 가장 먼저 꼽은 영화는 ‘바람불어 좋은 날’이었다. “성인이 돼 ‘평생 영화 하겠다’ 생각한 후부터 출연한 작품이에요. 1980년대는 어려운 시대를 살다가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는 시기였고 정확히 그 시대를 관통한 의미 있는 영화였어요.”
그는 이어 “예술성이 세계에 알려진 작품”이라며 임권택 감독과 처음 작업한 ‘만다라’를 언급했고 많은 관객과 만난 첫 영화인 ‘고래사냥’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를 졸업한 그는 베트남전쟁이 배경이 된 ‘하얀전쟁’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당시에 어떤 영화를 하고 싶냐고 물어볼 때면 더 나이 들기 전 베트남전에 참전한 병사의 모습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는 했어요. 그러다가 ‘하얀 전쟁’이라는 책이 나왔고 정지영 감독에게 영화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어요.” 그의 기존 이미지와는 상반된 부패한 형사 역으로 박중훈과 함께 출연했던 ‘투캅스’, 첫 1,000만 영화 ‘실미도’ 등 대중적인 작품은 물론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라디오 스타’도 ‘인생작품’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나이가 들다 보니 주연에서 조연으로 가는 과정에서 저를 연착륙시켜준 작품이에요. 비중은 작지만 존재감 있는, ‘내가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구나’ 생각했어요. ‘라디오 스타’도 작은 영화지만 따뜻하고 저를 닮은 캐릭터라 애정이 가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인 그는 신구가 조화롭지 못한 현재의 영화 현장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산업 자본화되는 과정에서 선배들이 예기치 않게 물러나게 되면서 그들이 설 자리가 줄어드는 한편 특유의 선후배 문화로 현장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 “일본 영화 ‘잠자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일본의 영화 현장을 보게 됐어요. 70대 중반의 편집기사하고 20대 초반의 의상 담당이 편하게 담배를 피우면서 이야기하더라고요. 현장에서 영화인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 저도 그런 현장을 앞으로 만들어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