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법복을 입은 이시진(19) 학생이 엄숙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20일 서울고법에서 열린 서울농학교 학생 23명의 ‘닌텐도 게임기 절도’ 사건 모의재판 풍경이다. 증인·변호사 등 역할을 맡은 9명의 학생은 ‘본인 것이 확실하냐’ ‘표시를 했냐’며 손가락 언어로 날카로운 법정 공방을 벌였다. 벌금 1,000만원을 구형받은 정진성(19) 학생이 양팔을 크게 흔들며 최후 변론을 할 때는 좌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옆에서 수화로 재판을 중계하던 권형관(34) 서울중앙지법 판사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이날 권 판사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서울농학교 학생들에게 재판관의 업무를 소개하고 수화 통역을 진행했다. 사흘 전부터 ‘수화스터디’에 참석해 연습했다는 그는 “문장마다 뉘앙스 차이가 있다”며 이날도 재판을 ‘진행’한다는 동작을 해야 할지, ‘지휘’한다는 동작을 해야 할지 통역관들과 상의하고 있었다. 3년 전 법무관 시절 “재판정에서 만날 농인에게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며 시작한 수화는 법정에서 빛을 발했다.
이날 모의재판은 학생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 됐다. 배심원 역할을 한 김민주(20) 학생은 “드라마처럼 실감이 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권 판사는 “사법시험 방식에서 학제로 운영되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체제로 바뀌면 장애인 학생들의 접근성도 높아질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현했다. 버스로 향하는 학생들에게 권 판사는 연신 손을 흔들며 말했다. “법조인 꼭 되세요. 오늘 만난 학생 중 한 분은 꼭 판검사나 변호사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