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 통화와 비교해 한국 원화의 실제 가치를 나타내는 실질실효환율이 9년 1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 들어 수출 증가세가 가팔라지며 경상수지 흑자도 쌓이고 있어 당분간 원화 강세 흐름은 지속될 전망이다.
1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 3월 전 세계 61개국 통화와 비교한 원화의 실질실효환율(REER)은 114.65로 집계됐다. 2008년 2월(118.75) 이후 9년 만에 최고치였던 2월 기록(114.02)을 또 경신했다.
실질실효환율은 기준년도 2010년의 값을 100으로 삼아 100 이상이면 물가 수준과 교역량 등을 고려한 자국통화 가치가 전 세계 통화의 평균보다 높고, 100 이하면 평균보다 낮다는 의미다. 현재 원화 가치가 61개국 평균에 비해 고 평가할 수 있다.
올해 들어 원화가치의 절상 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컸다. 지난해 12월 110.63을 기록했던 원화 실질실효환율은 올해 들어 3개월 연속 상승했다. 상승률은 3.63%다. 지난 석 달간 상승률은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러시아 등에 이어 61개국 중 7위를 기록했다. 반면 주요국 가운데 일본은 0.64% 상승에 그쳤고 미국(-1.91%), 유로존(-0.53%), 중국(-1.95%) 등은 오히려 하락했다.
4월 들어서도 원화는 강세를 보이고 있다. 연초 1,200원 수준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꾸준히 내려 지난달 28일 1137.9원을 보였다. 올 들어 약 60~70원 하락한 것이다. 원화 표시 달러 환율이 하락했다는 것은 원화 가치가 그만큼 상승했다는 의미다.
달러화 약세가 원화 강세를 부추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은 정책이 번번이 좌절되거나 의회에 막히면서 미국 경기 부양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졌다. 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올해 세 차례 금리 인상을 시사했다. 이는 시장이 예상한 네 차례보다 완화된 방식으로 금리를 인상하는 걸로 해석돼 달러 강세에 대한 우려도 줄어든 상황이다. 여기에 유럽도 프랑스 대선과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 등 정치 이벤트가 있어 글로벌 자금이 신흥국 가운데 견조한 경상수지 흑자를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로 유입되고 있다. 이날 산업통상자원부는 4월 수출이 전년과 비교해 24.2% 늘어난 510억달러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역대 2위 수출 실적이다. 올해 들어서 4개월 연속 두 자리 수 증가세를 보이며 수출이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무역수지는 133억달러 흑자를 기록, 63개월 연속 흑자 기조를 이어갔다. 세계 교역은 대부분 달러로 거래되기 때문에 무역수지가 흑자를 보이면 달러도 그만큼 많아진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원화는 강세를 보일 수 있다.
원화 강세는 수출 중소기업들에게 부담이 될 가능성도 있다. 대기업의 경우 대부분 환율을 어느 정도 헤지(위험분산) 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부족한 중기는 수출 때 마다 환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내고 “외환위기 이후 원달러환율 변동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감소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중소 수출기업에게는 간과하기 어려운 요인”이라며 “원화 가치 상승은 국내 수출제품의 가격경쟁력을 하락시켜 수출 회복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원화가 강세로 가도 외환 당국이 별다른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4월 중국과 우리나라를 인위적으로 환율을 올려(평가절하) 수출을 늘리는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외환당국이 원화 강세에 개입할 경우 오는 10월 환율조작국에 지정될 수도 있다. 환율조작국에 지정되면 국제통화기금(IMF)의 국내 외환시장 감시가 강화되고 미국 수출에 제재를 받는 등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