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마사다 요새의 최후

마사다 요새의 최후






예루살렘 동남쪽 100㎞ 지점의 마사다(Masada). 형태가 기묘하다. 사해(死海) 부근의 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았어도 정상 부분은 편평한 바위산. 탈무드, 선민의식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의 하나다. 마사다가 무엇이길래 그럴까. 로마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굴하지 않고 싸우다 마지막 순간에 전원 자살을 택한 역사의 현장이다. 마사다가 함락되며 제1차 유대전쟁도 끝났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까지 무려 1,875년 동안 떠돌이 민족으로 살았다. 마사다는 로마에 대한 항전은 물론 민족 최대의 수난인 디아스포라(Diaspora·이산)의 상징 격이다.

히브리어로도 ‘요새’를 뜻한다는 마사다는 알렉산더의 부하 장군들이 지배하던 시절부터 요새로 주목받았다. 높이 약 434m의 산 정상에 평균 너비 120m, 길이 620m, 둘레 1,300m인 평지가 있었다.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며 언제라도 적을 괴롭힐 수도 있고 사방이 절벽이어서 소수가 다수를 막을 수도 있는 지형이었다. 의심이 많았던 헤롯왕은 기원전 34년 유사시 저항 거점으로 삼기 위해 대규모 공사를 벌였다. 궁전 두 곳을 짓고 무기고와 식량 창고, 대규모 물 저장시설을 갖췄다.

헤롯이 건설한 마사다는 1차 유대전쟁(66~73)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리스계 로마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세금 납부 등으로 벌어진 갈등이 전면적으로 격화한 유대전쟁에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직후 열성당원들이 가족을 데리고 도망친 곳이 바로 마사다 요새.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차지한 직후 기념주화를 발행하며 승리를 자축했으나 마사다는 두고두고 로마군을 괴롭혔다. 공격해도 끄떡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인데다 잠시 한 눈 팔면 요새에서 병력이 나와 게릴라전을 펼쳤다.

로마는 대항하면 철저하게 짓누른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정예군단을 동원해 공성에 나섰으나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천명 남짓한 마사다의 저항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로마는 정규 군단병 9,000명과 유대인 전쟁 포로 6,000명을 투입했다. 로마군은 마사다 외부에 8개 방어진지를 설치하고 진지 사이는 성벽을 둘렀다. 탈출을 원천 봉쇄하고 외부 지원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로마는 고립된 마사다가 곧 항복하리라 생각했으나 유대인들은 2년 이상을 버텼다.

하지만 최후가 차츰 다가왔다. 로마군은 거대한 투석기로 25㎏이 넘는 돌을 날려 성벽을 부쉈다. 외부에 거대한 성을 축성하는 공병 작전까지 펼쳤다. 패배가 확실해지자 마사다의 지휘자 엘리야자르 벤 야이르가 전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마사다 요새의 유대인들이 로마에 잡혀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자유인으로 죽자고 연설했다.


“나의 고결한 동지들이여. 우리는 오래전부터 굳게 맹세했소. 결코 로마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이제 그 맹세를 실천에 옮길 때가 다가왔소. 내일이면 적들은 요새 안으로 몰려올 것이오. 적들은 우리를 살려주겠다고 하지만 우리 앞에서 성경을 찢고 조롱할 겁니다. 적의 손에서 우리의 아내와 아이들을 구합시다. 먼저 처자식을 죽이고 우리도 따라 죽읍시다. 노예가 되기보다는 자유라는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읍시다.” 더러는 결연하고 더러는 침통한 표정의 병사들에게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로마군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없애되, 식량 창고 한두 군데는 남깁시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음을 택했다고 믿게 해서는 안됩니다. 자, 다들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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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은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포옹한 뒤 칼을 들었다. 아내와 자식을 죽인 뒤 회의장에서 다시 모인 그들은 제비를 뽑았다. 뽑힌 사람 10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 자기 손으로 죽인 처자식 옆에 누웠다. 제비를 뽑은 10명은 요새 안을 돌며 전우의 목숨을 거뒀다. 남은 10명은 또 제비를 뽑아 똑같은 방식의 죽음을 택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스스로를 찔렀다.

서기 73년 5월2일(유대력으로는 4월15~16일). 마사다 요새 최후의 밤이 이렇게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요새는 로마군에게 떨어졌다. 가까스로 요새를 점령한 로마군은 경악했다. 사자같이 싸우던 전사들은 없고 어린아이와 여자를 포함해 960구의 시신만 남았을 뿐이다. 생존자는 달랑 7명. 피신했던 여자 2명과 아이 5명만 살아남았다. 마사다 요새가 떨어지며 66년부터 시작된 1차 유대전쟁도 끝났다. 이 전쟁에 동원된 로마군은 8만여 명. 로마가 치렀던 어떤 전쟁보다 많은 병력이 투입됐다. 유대전쟁에서 이긴 로마는 반란의 싹을 잘랐다며 개선문까지 세웠으나 저항은 113년과 133년의 2차·3차 유대전쟁으로 이어졌다.

로마와의 세 차례 전쟁 이후 전세계에 강제로 흩어진 유대인의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다. 갖은 압박과 차별에도 끝내 민족의 정체성과 언어를 지켜나간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마사다로 상징되는 불굴의 저항정신은 유대인의 유전인자 속에 살아 숨쉰다. 물론 반론도 없지 않다. 이스라엘이 대화보다는 전투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상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심지어 마사다 요새의 항전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마사다 요새에 대한 기록은 ‘유대전쟁사’에만 유일하게 전해져 내려온다.

‘유대전쟁사’를 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오랫동안 ‘민족 배신자’로 여겨져 온 인물. 갈리리 지방 수비대장이었으나 패전 뒤 로마에 협조한 탓이다. 로마 시민권을 얻고 황제 가문의 성씨 ‘플라비우스’까지 사성(賜姓) 받은 요세푸스가 살아남은 사연이 마사다와 대조적이다. 패전을 앞두고 동료와 부하들이 차례로 자살한 상황. 최후의 2인으로 남은 요세푸스는 병사를 설득해 목숨을 이어나갔다. 민족을 배반한 요세푸스에 대한 반감 탓이었을까. 마사다의 항전은 오랫동안 구전의 대상에 머물렀다.

마사다의 항전은 19세기 국제 시오니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덩달아 조명 받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1963년 마사다 유적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나서 요세푸스의 기록이 대부분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발굴 작업에서는 두루마리 구약성서 14개도 같이 나왔다. 다만 사람이나 무기류에 대한 출토량은 극히 적었다고 전해진다. 마사다 얘기가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알 수 없다. 확실한 점은 이스라엘이 ‘마사다’를 철저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군 신병 훈련소를 비롯해 각종 군사학교의 마지막 훈련 코스가 바로 이곳이다. 이스라엘의 젊은 장병들은 마사다의 정상에 서서 이렇게 외친다. ’조상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잊지 마라‘, ‘마사다를 기억하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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