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체결한 모든 무역협정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주장해온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방향에 미묘한 변화 조짐이 나타났다. 협정을 원점으로 돌리는 대신 기존 조항을 더 강력하게 집행해 무역적자를 줄이겠다는 방침을 시사한 것이다. 조항 적용이 전례 없이 엄격해지는 대신 협정의 일방적 폐기나 대대적인 재개정은 줄어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윌버 로스 미 상무장관은 9일(현지시간) 외신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를 무기로 무역을 억제하려는 목표를 가지지 않았다면서 “우리가 제한하려는 것은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칙 및 자유무역협정(FTA)의 원칙을 침해하는 무역”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미국의 무역적자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라며 미국의 원유 수입 등으로 발생하는 “비난할 수 없는” 적자도 존재한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최악의 협정’이라고 공격했던 캐나다·멕시코와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에 대해 미 행정부가 협정 폐기 후 양자협정을 다시 체결할지, 현재의 3자 협정 체제를 유지할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로스 장관이 기존 무역협정을 뒤집기보다 엄격히 집행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는 입장 변화를 보인 것은 무역 상대국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도 실질적인 무역지표 개선 효과를 추진하는 등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주의 배격을 명분 삼아 중국 주도의 글로벌 질서 확산을 노리는 데 대한 견제의 의도도 엿보인다. 중국은 오는 14~15일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정상포럼의 슬로건으로 ‘세계화 2.0(Globalization 2.0)’을 설정하고 28개국 정상들에 세계 속 중국의 역할 확대를 지지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다만 로스 장관은 WTO의 최혜국관세(MFN) 규칙을 ‘자유무역의 장애물’이라고 비난하며 상호주의에 입각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WTO 체제에서 협정이 없는 국간 교역 시 통상조약 중 가장 낮은 관세율을 적용해야 한다.
한편 로스 장관은 트럼프 행정부가 주창해온 ‘성장률 3%’ 목표를 올해 이루기 어렵다고 전망하며 의회에 화살을 돌렸다. 그는 “의회가 만사를 느리게 진행해 (행정부) 절반이 아직 공석”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기업친화적 정책이 모두 실현된다면 성장목표는 1년 안에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