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 속에 선장 없는 배처럼 ‘표류’하던 대한민국호는 마침내 새로운 선장을 맞게 됐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헤쳐나가야 할 대외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존중, 미국 주도의 다자협력, 자유무역의 확산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상당한 도전에 직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100일이 지나기까지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에 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가치보다는 국익을 중시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은 더 이상 세계무역기구(WTO)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같은 다자적 경제협력체를 주도할 생각이 없다. 자유무역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으나 기왕 체결된 자유무역협정(FTA)을 재협상해 철저히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할 태세다.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트럼프 행정부는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보다는 이익과 부담을 공평하게 나누는 동맹으로 가자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트럼프 행정부가 아시아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유럽이나 중동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위협받을 경우에만 개입하는 반면 아시아에서는 미국의 군사력을 증강하고 한반도·동중국해·남중국해 문제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확실히 하고 있다. 21세기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곳이 아시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구상에서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인 중국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신정부는 미국의 전략적 집중도, 특히 북핵 문제에 대한 높은 관심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최고의 압박과 관여(maximum pressure and engagement)’로 집약되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필요하므로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 자체를 배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의미 있는 대화, 즉 비핵화 대화를 위해 최소한 북한의 (검증 가능한) 핵 동결 정도는 이끌어내야 하는데 중국조차도 이것이 대화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매서운 압박이 가해져야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의 고도화를 늦추거나 중단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 대화할 의향이 있다는 일부 외신 보도도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 신정부가 북한과의 의미 있는 대화를 원한다면 관련국들과 철저히 협의해 대북 압박의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한다.
강대국들이 한국만 빼고 서로 협의하는 ‘코리아 패싱’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를 보완한다는 차원에서 우리 나름의 북핵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북한의 약점과 급소를 찾아내 이를 공략할 수 있는 방안을 미국과 중국에 제시해야 한다. 현 단계에서 설익은 남북 대화는 대북 레버리지가 될 수 없다. 자칫 북한이 한미 이간 전략을 쓰기도 전에 한미 관계가 벌어질 수 있다. 우리가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생각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내 양측을 설득한다는 식이면 곤란하다.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중국은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한미 간 틈새의 크기를 주시할 것이다. 한미 간에 이견이 있더라도 밖으로 드러내지 말고 조정을 해 철저한 공조체제를 유지한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한미 동맹을 중심으로 대북정책을 주도해나가야 코리아 패싱을 방지할 수 있다.
탄핵정국에서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았기에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한미 동맹을 이익 동맹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미 동맹의 토대는 민주적 가치라는 점을 문 대통령이 ‘감동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축적된 상호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우리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방위비 분담금 협상, 한미 FTA 재협상 등에 치열하고 당당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전 외교부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