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적으로 국내 주요 기업 전문경영인의 평균 재임 기간은 약 3년이다. 물론 당사자의 역량, 업계 현황, 대내외적 분위기에 따라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무려 10년이나 별다른 잡음 없이 회사를 이끌어온 CEO가 있다. 바로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이다. 총 10번의 연임에 성공한 유 사장은 금융권을 넘어 업계 전반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유상호 사장이 ‘장수 CEO’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재임 11년 차를 맞아 그는 어떤 새로운 전략을 준비하고 있을까.
“초대형 투자은행(IB)을 시작하는 올해는 저에게 재임 11년 차가 아닌, 새로운 출발의 1년 차로 기억될 것입니다. 새로운 10년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으로 장기 전략을 세워 전 임직원들의 의지와 역량을 결집시키겠습니다.”
지난 3월 말 10회 연임에 성공한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은 담담한 어조로 이 같이 소회를 밝혔다. 지난 2007년 만 47세의 나이로 국내 최연소 증권업계 CEO에 오른 유 사장은 그동안 한국투자증권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어왔다.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그는 최연소를 넘어 국내 최장수 증권업계 CEO라는 타이틀까지 갖게 됐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연임 횟수다. 한국투자증권 CEO의 임기는 1년이다. 10년 재임은 곧 10번의 연임을 의미한다. 매년 성과를 입증해 자리를 지켜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증권업계는 흐름에 매우 민감한 분야다. 빠르게 변하는 증권업계의 트렌드를 정확히 포착해 내는 게 CEO의 중요한 임무인 까닭에, 별다른 부침 없이 10년간 한국투자증권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유상호 사장의 리더십은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변화와 혁신을 이끈 최장수 CEO
“증권업계에서 유상호 사장은 ‘전설적인 제임스(Legendary James)’라 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는 국내 증권업계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 ‘진짜 전설’이 돼가고 있습니다.” 최근 10회 연임에 성공한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을 바라보는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평가다. 여기서 말하는 제임스가 유 사장의 영어이름. 그가 과거 대우증권 런던지사에서 근무했던 1990년대 초반, 영국 런던 금융가에는 떠도
는 말이 하나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국 주식을 사려면 제임스에게 가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제임스는 당연히 유상호 사장이었다. 당시 유 사장은 한국 투자에 관심이 많은 영국 펀드매니저들을 위해 한국 회계기준과 제도, 관련 법규가 담긴 책을 사비로 100여 권 구입해 제공했다. 그는 이 같은 적극적인 스킨십을 바탕으로 현지 관계자와 돈독한 신뢰를 쌓아 ‘제임스’라는 이름을 영국 금융업계에 각인시켰다.
이 같은 유상호 사장의 역량은 국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2007년 한국투자증권 사장 취임 이후 이뤄낸 재무적 성과에서도 그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취임 당시 1조7,900억 원 수준이었던 한국투자증권의 자기자본은 지난해 말 기준 4조 원 대로 증가했고, 고객 예탁자산도 2007년 말 60조 원에서 현재 150조 원 수준으로 크게 늘어났다. 10년 만에 자기자본과 자산 모두 2배 이상 확대한 큰 성장을 이뤄낸 셈이었다.
유 사장은 이 과정에서 전략적인 변화를 도모했다. 취임 초기부터 주식중개 수수료 수입에 의존하던 기존 증권업계의 전략에서 벗어나 투자은행(IB)과 자산관리(AM) 영업을 주축으로 하는 ‘IB-AM’ 사업모델로 확장을 꾀했다. 이를 기반으로 급변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도 꾸준한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구조를 구축해 불황 속에서도 꿋꿋이 선방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실제로 한국투자증권은 지난 2016년 브로커리지, 자산관리, IB 등 전 분야에서 고른 실적을 거두며 당기순이익 2,372억 원을 기록해 국내 대형 증권사 중 2위에 오를 수 있었다. 지난해 기업공개(IPO) 시장에선 두산밥캣, 삼성바이오로직스 같은 굵직한 대어를 포함해 총 14건 1조3,610억 원 규모의 IPO를 맡아 이 부문에서 업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유 사장의 역량과 리더십은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수익기반을 마련한 점에서 특히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미래 금융 시장에 대비하기 위한 유상호 사장의 혜안도 한국투자증권을 증권업계 리딩 컴퍼니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오는 6월 출범 예정인 인터넷전문은행 ‘카카오뱅크’다. 현재 한국투자증권의 지주사인 한국투자금융지주는 카카오뱅크의 지분 57%를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최대 주주다. 카카오뱅크가 정식 출범하게 되면 한국투자증권은 이를 통해 모인 자금으로 펀드, 주가연계증권(ELS) 등 다양한 중금리 상품 등을 선보여 고객 기반을 넓혀나간다는 계획이다.
증권업계 관계자 A 씨는 “한국투자증권의 카카오뱅크 컨소시엄 참여는 기존 증권업계를 벗어나 은행업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하는 시도 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며 “카카오뱅크를 통해 확보한 은행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다양한 시너지 창출에도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에서 맹활약한 전설의 제임스
유상호 사장 취임 이후 한국투자증권의 위상은 해외시장에서도 달라졌다. 특히 금융업계의 동남아시장 진출 전진기지로 불리는 베트남 진출은 ‘전설의 제임스’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유 사장은 지난 2006년 업계 최초로 베트남 펀드를 선보였다. 런던 근무 당시부터 베트남 시장을 눈여겨봤던 유 사장의 첫 번째 도전이었다. 하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럼에도 유 사장은 베트남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표직에 오른 2007년부터 베트남 공략 해법 찾기에 골몰했다. 해답은 바로 현지 증권사의 인수였다. 그는 2010년 당시 베트남 시장 70위권이었던 현지 증권사 EPS를 인수해 현지법인 ‘KIS베트남’을 설립했다.
그러나 난관은 계속됐다. 해외에서 공격적인 전략을 펼치기 위해선 경영 안정화가 필수였다. 하지만 베트남 현지 자본시장법상 외국인 투자자는 현지 기업 지분 49% 이상을 가질 수 없었다. 그 때 유상호 사장은 ‘정공법’으로 해결책 마련에 나섰다. 조급함에 쫓겨 무리한 행동을 취하기보단 천천히 해결책을 찾기로 한 것이었다.
업계 관계자 B 씨는 말한다. “유상호 사장이 해외사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바로 ‘신뢰’입니다. 현지 금융당국과 시장으로부터 신뢰만 얻는다면 장기적으로 다양한 도전에 나설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죠. 우선 유 사장은 KIS베트남의 근무인력 대다수를 현지인으로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증권 관련 교육 등 인재육성에 필요한 지원 활동을 꾸준히 진행했죠. 현지 금융당국 관계자들과 오랜 동안 친분을 쌓으며 상호 신뢰도 구축했고요. 그래서인지 베트남 금융당국은 지난 2014년 예외적으로 외국인투자지분 한도 확대를 승인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투자증권은 KIS베트남 지분을 92.3%까지 끌어올려 경영권 안정화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KIS베트남은 설립 5년 만에 현지 시장 톱10 진입에 성공했다. 한국 투자증권은 지난해 베트남에서 19억 1,324만 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려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 증권사 중 1등을 차지했다.
초대형 IB 대전의 원년
국내외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낸 유상호 사장은 올해가 한국투자증권에게 새로운 도전의 원년이 될 것이라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도전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유 사장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초대형 투자은행(IB)이다. 현행법상 자기자본 4조 원 이상인 초대형 IB의 경우, 어음 발행 및 외국환 업무 등을 할 수 있는 단기금융업 인가를 취득할 수 있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투자증권의 자기자본은 4조 1,440억 원 수준이다. 별다른 문제만 없다면 한국투자증권은 올해 상반기 중 초대형 IB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다.
유상호 사장의 의지는 확고하다. 유 사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2017년은 초대형 IB 대전이 시작되는 원년이 될 것”이라며 “이 싸움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다양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해낼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대다수 업계 전문가들은 한국투자증권이 초대형 IB 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한다. 경쟁사들보다 한발 앞서 IB 분야에 진출, 업계 최고 수준의 관련 역량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국투자증권 관계자도 “올해는 IB 분야에서 새로운 사업이 발굴되고 자본시장 전체 파이가 커지는 원년이 될 것”이라며 “업계 최고 수준의 IB 역량을 십분 발휘해 운용성과를 제고하고, 그 운용 성과를 고객과 함께 나누기 위한 경쟁력 있는 상품을 선보여 시장을 선점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상호 사장에게 올해는 특히 중요하다. 초대형 IB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만큼 대규모 투자 기회도 생겼지만, 실패할 경우 불어 닥칠 후폭풍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 자칫 지금까지 거둔 성과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유 사장은 당장의 결과보단 새로운 10년을 준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장기적인 전략을 구사하려 하고 있다. 지금껏 그가 보여줬던 것처럼 말이다. 과연 유 사장은 내년에도 11회 연임이라는 기록을 세울 수 있을까? 올해 유상호 사장과 한국투자증권이 보여줄 행보와 성과를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