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A씨(32)는 오늘도 퇴근하는 길 스마트폰을 켜고 한 포털사이트에서 연재 중인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에 빠져든다. “오늘도 중장비보다 오래 일했다”는 말을 달고 사는 여주인공 ‘이시다’의 혼자 사는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공감가는 소재와 이야기에 흠뻑 매료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다.
#혼자 사는 B씨(39)는 매일 저녁 애플리케이션에 글을 업로드한다. 오늘 내 하루를 위한 짧은 글을 한 편 올리고 마지막에 닉네임을 쓴 뒤 앱을 사용하는 익명의 다수에게 글을 공유한다. 하루동안의 내 생각과 감정을 누군가와 나눈다는 행복한 상상으로 잠이 든다.
혼자 사는 ‘1인 가구’를 위한 콘텐츠의 증가세가 눈에 띈다. 혼자 밥을 먹고, 남들 눈치 안 보고 원하는 물건을 사는 ‘그들의 사는 세상’이 점점 넓어지면서 그들을 삶을 소재로 하거나 오직 그들만을 위한 웹툰과 노래, 심지어 광고까지 늘고 있다. 무심한 듯 툭 던지는 것 같지만 혼자 사는 이들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과 따스함을 주는 고마운 존재가 된 콘텐츠를 찾아봤다.
△일상의 혼자를 소재로 한 ‘웹툰’
조금은 부족하고, 또 약간은 불안정한 삶 속에서 행복을 꿈꾸는 한 여성의 일상을 다룬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은 많은 ‘혼자 사는’ 여성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며 인기 웹툰으로 자리매김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외롭지만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20대 초반의 여성 ‘이시다’의 내면을 담아낸다. 연재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매회 평점 9.9점을 기록할 만큼 인기가 뜨겁다. 지난해 한국만화가협회가 뽑은 ‘오늘의 우리 만화’에 선정됐고 최근에는 책으로 출판돼 일주일 만에 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을 누르고 베스트셀러에 등극하기도 했다.
한 포털사이트 웹툰 담당자는 “최근 웹툰 작가들이 ‘혼자’를 소재로한 작품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며 “혼자 사는 사람들, 즉 혼족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웹툰 구독자 김선애(26)씨는 “웹툰을 보면서 ‘나만 그랬던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요즘 정말 많이 한다”며 “혼족을 위한 식당, 술집 등 그런 공간이나 서비스와는 또 다른 느낌인 것 같다. 상품이나 공간이 감성적인 면까지 충족해주진 않지만 이런 콘텐츠들이 혼자 사는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상]‘혼족’ 담고 있는 온라인 콘텐츠 “혼자여도 괜찮아”.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의 여주인공 ‘이시다’를 모티브로 한 ‘혼자씨’의 하루를 가상일기 형식으로 담아냈다. /정수현기자·조은지인턴기자 |
△혼자가 익숙한 우리, 정서 파고든 ‘음악’
대중음악 시장에서도 ‘혼족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최근 앨범을 발매한 혼성 그룹 어반 자파카의 신곡 ‘혼자’는 발매와 동시에 8곳 음원차트 1위를 싹쓸이하며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혼자 하는 말, 혼자 자는 밤, 혼자 있는 것. 그건 내게 당연한 것. 또 너에게는 안쓰러운 것’이란 가사는 혼자 사는 사람들의 정서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인디가수 ‘치즈’의 퇴근시간 역시 혼자 사는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곡이다. 노래는 “나는 매일 똑같은 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 나는 매일 똑같은 얘길 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오늘이 특별한 날일 수도 있는데 나는 왜 또 이리 외로운 건지”라 말하며 혼족들을 다독인다. 이 곡은 단기간에 ‘힐링송’으로 꼽히며 유명가수가 아님에도 음원차트 상위권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작곡가 이택승 씨는 “대중가요 속에 혼자인 일상을 소재로 한 가사가 있긴 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사랑, 즐거움, 유쾌’ 등을 소재로 한 곡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엔 ‘싱글, 혼자, 집, 미니멀라이프’ 등과 관련한 감성을 자극하는 가사의 비중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내 생각을 들어봐…짧은 온라인 ‘에세이’
‘싫어’. 스마트폰에 ‘오늘의 주제’ 알림이 울린다. 글을 쓰러 들어가 보니 1분 만에 벌써 28개의 글이 올라와 있다. 그 가운데 “너는 항상 그랬어. 고맙습니다, 라는 말은 잘해도 싫어요, 라는 소리는 못했어. 만약에 지금 싫은데도 계속 하고 있는 일 있으면, 당장 멈춰. 너 아주 귀한 애야. 알겠지?”란 글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 글을 쓴 사람들은 유명 작가도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다. 스마트폰 앱에서 제공하는 플랫폼을 통해 ‘1인 작가’가 된 사람들이다. 일상을 고스란히 담아낸 짧은 글을 쓰고 공유할 수 있도록 한 애플리케이션 ‘씀’은 누구나 손 쉽게 콘텐츠를 제작하고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씀’ 이용자들은 매일 오전 7시와 오후 7시에 ‘휴일, 유머, 심심하다’ 등 다양한 글감이 올라오면 앱에서 제공하는 칸 위에 글을 올린 뒤 이용자들과 각자의 글을 공유한다. 앱이 만들어진지 6개월 만에 벌써 218만2,054편의 글이 올라왔다. ‘씀’ 개발자 이윤재(27) 씨는 “지난 겨울방학 때 홍보를 시작해서 약 1,000명 정도 모아보자는 목표를 세웠는데 3~4일차에 반응이 오기 시작하더니, 일주일 만에 2,000명을 돌파했고 12월 말에 만 명까지 이용자가 늘어났다”고 말했다. 앱이 단기간에 공감을 받은 이유에 대해 ‘씀’ 제작자 이지형(24) 씨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를 봐주는 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게 우선시되는 추세다. 어떤 SNS는 개인 이름도 뜨고, 댓글도 바로 달리는 데 씀은 거기서 격리돼 오그라들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남길 수 있어 부담이 적은 것 같다. 내가 좋아서 하는 혼술, 혼밥처럼 글쓰기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즐길 수 있어 공감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평소 글쓰기를 즐겨한다는 이지은(27)씨는 “‘약한 연결관계’가 생기는 것 같다. 내 생각을 주장하고 꺼내기 힘들 때 글로 옮겨서 퍼뜨리고 그 글이 공감을 받으면 생각을 지지받는 것 같아서 외롭지 않단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점차 사회적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는 ‘혼족’를 위한 콘텐츠 시장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늘어나는 1인 가구 비율 뿐 아니라 ‘혼자’를 꺼리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사회 분위기도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 한다. 다음카카오가 SNS에 올라간 글을 지난해 빅데이터로 분석한 결과, ‘혼자’란 단어는 과거 ‘힘들다’, ‘싫다’, ‘외롭다’ 등 부정적인 서술어와 함께 사용됐지만 최근 ‘좋다’, ‘재미있다’ 등 긍정적 서술어와 사용되는 비율이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트렌드연구소 박상희 연구원은 “혼족이라는 게 혼자 사는 사람들만은 말하는 건 아니다. 가족 안에서 발생할 수 있다. 각자의 조직 속에서도 ‘혼자’를 추구하는 성향이 짙어지고 있는 건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을 겨냥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콘텐츠가 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 연구소 소장은 “혼족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것은 결국 ‘공감’이고 ‘일상’이다. 또 혼자 사는 이들만이 보는게 아니라, 조직 속에서도 혼자이길 지향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사기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콘텐츠는 스마트폰을 즐겨하는 젊은 세대를 넘어 다양한 연령층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박 연구원은 “은퇴자 증가, 이혼율 증가, 출산율 저하로 전 세대에 걸친 혼족 문화가 생길 수 있다. 현재는 2030 세대가 주로 온라인에 드러나 이들의 일상이 두드러져 있지만 곧 전 연령층을 겨냥한 콘텐츠들도 많이 생겨날 것”이라며 “(혼족들이)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는 메시지와 함께 이 트렌드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소장도 “현재 국내 1인 가구는 30%에 육박했다. 대중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 이 흐름이 집단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현상으로 본다면 앞으로 관련 콘텐츠 시장은 그 범위가 더욱 넓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수현기자 조은지인턴기자 valu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