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남북 전쟁과 면화, 채권






미국 내전(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6월 1일, 남부동맹에 특이한 금융상품이 선보였다. 국채와 면화를 연계한 ‘7% 면화 공채(7 Percent Cotton Bond)’를 발행한 것이다. 미국의 경제사가 겸 투자분석가인 피터 번스타인(Peter Bernstein)의 저서 ‘리스크, 신을 거역한 사람들’에 따르면 면화 공채는 국가의 이름으로 발행된 최초의 파생 금융상품이었다. 면화공채의 특징은 두 가지. 첫째는 지불 수단으로 남부 동맹이 발행한 달러 대신 영국 파운드나 프랑스 프랑화로 매매할 수 있었다. 요즘 기준으로는 외화 표시 국채 발행이었던 셈이다. 둘째, 채권 보유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면화로 교환이 가능했다.

남부 동맹 정부가 정한 면화공채의 교환 가격은 1 파운드(무게) 당 12센트. 당시 국제 시장에서 면화 매매가격은 파운드당 48센트보다 훨씬 쌌다. 더욱이 채권 보유자는 상품(면화) 인도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항해 가능한 하천이나 철도까지 화물(면화)을 운송하는 책임을 남부 동맹이 졌다. 발행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인수자에게 유리했다. 면화로 바꿔주는 조건만으로도 투자자는 최대 4배 시세 차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더욱이 면화의 가격이 올라가면 기대 수익률도 높아졌다. 채권 가치가 상승하거나 면화 교환으로 얻는 이익이 커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남부 동맹이 이 상품을 설계하고 판매한 이유는 자금난. 특히 남부가 생산하지 못하는 무기를 사들일 외화가 필요했고, 정교하게 설계된 금융상품이라는 묘수를 짜냈다. 면화 공채의 의도는 한 마디로 설명이 가능하다. ‘리스크 헤징(Risk Hedging)’. 전황 또는 발행량에 따라 가치가 떨어질 수 있는 남부동맹 화폐 대신 외국환으로 거래해 위험을 낮췄다. 남부동맹의 달러화는 전쟁 직전까지 미 연방의 정화(正貨) 대비 90% 수준의 가치를 지녔으나 전쟁 말기에는 10% 아래로 떨어졌다. 파생상품인 면화 공채는 이 같은 화폐 가치 폭락 가능성에 대비한 상품이었다.


면화를 국제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교환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남부 동맹이 전쟁에 패배해 원리금을 못 건질 경우에 대한 안전 장치. 화폐가치 폭락은 물론 승패의 리스크까지 줄여주는 옵션을 제시한 셈이다. 발행 조건이 나쁘지 않아 면화공채 인수 전문회사가 생기고 영국과 프랑스 투자자들의 관심도 끌었다. 남부 동맹은 자금도 조달하고 남부의 승리를 바라는 유럽 투자자들을 확보한다는 계산이 통한 셈이다. 투자자 명단에는 미래 영국 수상이 될 윌리엄 글래드스톤과 로버트 세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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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동맹은 면화 공채를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팔았다. 상품명 그대로 표면 금리 7%. 남북전쟁 이전에 발행된 미국 연방정부의 국채(6%)보다 1%포인트 저렴했을 뿐이다. 옵션이 없었다면 두자릿수 금리에도 자금조달이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남부는 면화공채 발행으로 1,500만 달러를 조달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전황. 전세가 크게 밀리며 면화 공채의 인기도 시들었다. 면화 농장 자체가 북군에 점령 당하거나 불타 버려 면화 공채도 해외 투자자들에게 외면받았다.

해외자금 조달이 기대만큼 여의치 않자 남부 동맹은 징세 확대를 시도했지만 그마저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대농장주들의 조세 저항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경제 규모가 북부의 절반이어서 경제력이 딸리는 남부의 재정난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북부는 내전 기간 중 전체 전쟁 비용의 20%를 세금으로 충당했으나 남부의 전비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8%에 그쳤다. 이래저래 자금을 마련할 길이 막히고 전투에서도 연패한 남부는 지폐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물가가 치솟을 수밖에.

전쟁기간 중 북부의 물가 상승률이 80%인 데 반해 남부는 9,000%의 물가고에 시달렸다. 전투는 물론 경제 운용에서도 완벽하게 패배한 꼴이다. 대농장주들이 노예제도 유지라는 기득권만 주장했을 뿐 납세 의무는 저버리는 풍토에서 머리를 짜내 만들어낸 그럴듯한 금융상품도 소용 없었다. 목표에 훨씬 못 미치는 600만 달러 어치가 조달됐을 뿐이다. 끝까지 면화 공채를 갖고 있던 해외투자자들은 종전 후 미국 연방정부에 부채 승계를 요구하며 상환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했다. 면화 공채 역시 금융사의 초라한 에피소드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가의 이름으로 발행한 첫 파생상품인 면화공채는 일부 투자자들에 손실을 입혔다. 그래도 요즘 파생상품에 비하면 약과다. 자산 가치가 떨어지는 담보물로 끝없이 빚을 내며 금융자본의 배만 불린 게 바로 파생상품이었고 그 결과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으니까. 자본주의 최초의 투기인 17세 초반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도 옵션(option)에서 비롯됐다. 옵션을 활용한 투기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길다. 2,400여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도 다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제 1권 11장에는 밀레토스의 탈레스(Tales·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한 그리스 자연철학자)가 올리브 농사의 대풍을 예견하고 올리브 기름 짜내는 기계를 빌리는 계약을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옵션을 활용한 투기에 해당되지만 정작 고대 그리스 7대 현인 중의 한 사람인 탈레스는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현자는 가난해도 마음만 먹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지혜를 선보였을 뿐이다. 수천 년의 세월 탓일까. 오늘날의 현인, 많이 공부하고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들은 왜 그리도 돈과 반칙행위에 부끄러움 없이 매달리는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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