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반민특위 습격 사건



1949년 6월 6일 월요일 오전 8시 30분, 서울 남대문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무장 경찰병력 50명과 함께 들이닥쳤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대가 에워쌌다. 윤기병 서장은 권총을 휘두르며 고함질렀다. “여기 있는 놈들, 모조리 끌고 가!” 무장 경관들은 특위 직원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통신기기와 호신용 무기는 물론 서류 전체를 압수당하고 35명이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급보를 듣고 달려온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전혀 무섭지 않았다. 뒷배가 든든했기 때문이다. 검찰총장이면서 반민특위의 특별검찰부장을 맡고 있던 권승렬도 수모를 당했다. 말단 순경이 권 총장의 가슴에 총을 들이대며 권총과 신분증을 빼앗았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소리치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네, 검찰총장님이십니다’. ‘알면서도 이렇게 불손하게 구느냐?’고 재차 묻는 권 총장의 질문에 대한 말단 경찰의 대답. ‘상부 지시라 어쩔 수 없습니다.’ ‘경찰의 최고 상부가 바로 나 아니냐’는 권 총장의 얘기도 소용없었다. 반민특위를 습격한 경찰들은 최고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었으니까.


독립운동가들은 이 사건을 듣고 울분을 토했다. 일제 강점기 친일과 민족 반역 행위를 잡아내는 반민특위가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경찰들에 의해 습격 당하다니! 숨어서 석고대죄해도 모자랄 친일파들이 동트는 월요일의 아침 반민 특위를 습격한 사건에 여론이 들끓었다. 배후를 색출하라는 국회 요구에 이승만 대통령이 바로 나섰다. “반민특위의 특경대(특별경찰대) 해산은 내가 명령한 것이며, 국회 요청대로 나가서 말하고 싶으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참석 못하니 미안하다.”

장경근 내무부 장관은 바로 국회 보고를 이어나갔다. “서울시 경찰국이 경찰관 40여 명을 동원해 오늘 아침 8시 55분에 반민특위 특경대 20명을 무장해제시켰다. 동시에 이들을 검거하고 특위 직원들이 소지하고 있던 권총 16정과 수갑 하나, 일본도 한 개 등을 압수했다. 본래 특경대는 내무부에서 정식 발령한 경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위에서는 경위니 경감이니 하는 명칭을 붙여 경찰관의 행동을 해왔다. 정부에서는 수삼 차례 이들의 해산을 요구해 왔으나 듣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들은 정부만이 갖고 있는 경찰권을 불법행사해 왔으므로 강제 해산시킨 것이다. 이는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내무부 장관의 보고대로 반민특위 특경대의 법적 지위를 둘러싼 논란이 적지 않았다. 이승만 행정부는 ‘특경대의 법적 근거’를 집요하게 따졌다. ‘국회가 설치한 특별위원회에 특별재판부와 특별검찰부가 생긴 것도 3권 분립을 훼손하는 행위이며 특히 경찰 기능을 맡는 특경대는 위법이니 해산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것. 특별재판부장을 맡았던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은 이승만 행정부의 이런 불만에 ‘소송을 제기하라’며 맞섰다. 야당이 우세한 국회에서는 ‘특위 하부 조직으로 특경대는 위법이 아니다’며 행정부와 각을 세웠다. 국민들은 반민특위 특경대가 친일 인사를 체포할 때마다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다.

경찰의 습격 직전, 반민특위 특경대는 시경 최모 사찰과장을 체포해 경찰들의 불만을 샀다. 악질 친일 경찰의 대명사로 불렸던 노덕술이 특경대에 체포됐을 때도 술렁였던 경찰 조직은 이번에는 단체행동까지 펼쳤다. 반민특위 간부의 쇄신과 반민특위 특경대 해산, 경찰관에 대한 신분 보장을 요구하며 이런 사항들이 48시간 이내에 해결되지 않으면 총퇴진한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었다. 국회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이 밤에 집을 방문해 ‘살살 다루라’고 부탁해왔다“라며 “이를 거절한 직후에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는 증언을 남겼다.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왜 반민특위를 배척했을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어째서 해방 직후에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하고 1949년까지 왔을까라는 점이다. 격변의 20세기 중반, 한국은 민족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다. 프랑스는 해방되자마자 나치 협력자에 대해 6,763건 사형을 선고해 767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종신 강제노동 2,072명, 무기 강제노동 1만631명, 공민권 박탈 3,578명 등은 주로 공직자와 언론인, 지식인 등에 집중됐다. 군 장교와 공무원 12만 명도 쫓겨났다.


중국 국민당은 항일전쟁 당시에는 한간(漢奸·민족반역자)이라도 관대하게 대했으나 1945년 승리한 직후 2만 5,000여 혐의자를 처리했다. 중국 공산당도 일본 간첩 등을 인민재판에 넘기며 사적 린치까지 눈 감았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베트남 역시 제대로 된 정부 없이도 민족을 배신한 죄과를 물었다. 김일성 일파가 권력을 장악한 북한에서도 친일파 숙청이 이뤄졌다. 이 땅에서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1차적 책임은 우리 민족의 역량 부족에 있으나 미 군정에 실질적인 귀책사유가 있다. 군정의 행정 편의를 위해 일본 관료와 경찰 출신을 그대로 중용한 것이다. 여기에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국내 기반이 약한 이승만도 이들의 충성을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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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의 적기를 흘려보낸 미 군정은 1947년 남조선 과도입법의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도 눈 감았다. 결국 친일 청산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이후에나 논의돼 반민특위까지 설치했으나 이번에는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벽에 막혔다. 반민특위 출범부터 이 대통령은 반공 궐기대회로 위장된 반민특위 반대 대회에 축사를 보냈다. 친일 경찰 출신들이 장악한 경찰과 내무부, 일부 언론이 끈질기게 반민특위의 발목을 잡았다. 예산도 막혔다. 1949년 운영비로 7,800만 원을 신청했지만 3,000만 원만 배정받았다. 사업비나 조사비는 아예 지급하지 않았다.

일부 여당 지는 ‘반민특위가 490여만 원을 부정하게 사용했다’는 오보를 의도적으로 내보냈다. 당시 기획처와 합의된 예산 전용인데도 부정 사용했다는 보도를 통해 반민특위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였다. 가장 끔찍한 방해는 미수로 끝난 반민특위 수뇌부 유인 암살 계획. 대법원장을 비롯해 반민특위에 호응하는 정치인들까지 판문점으로 유인해 술을 먹이고 암살한 뒤 북한과 내통 혐의를 씌우려고 꾸민 적도 있다. 요인에 대한 테러를 기획한 노덕술 시경 수사과장은 ‘실패한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는 판결로 풀려나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반민특위 습격을 전후해 이 땅에서는 해괴한 사건이 연이었다. 미 대사관이 ‘실체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사건’이라고 평했던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정부에 비판적인 소장파 의원 10여 명이 조사받거나 갇혔다. 5월 말에는 이승만 대통령 지지자 수백 명이 반민특위에 몰려와 ‘빨갱이 물러가라’는 시위도 벌였다. 반민특위 습격 20일 뒤(6월 26일)에는 백범 김구가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권총 탄환에 맞아 숨졌다. 권력은 더욱 흉폭 해지고 반민특위 역시 사실상 힘을 잃었다. 민족 반역자들의 친일 행위를 밝혀낼 기회는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반민특위의 와해는 우리 역사에 깊은 상흔을 안겼다. 친일파의 득세는 가치와 규범의 상실을 낳았다. 친일과 독재, 부정부패는 마치 삼종 세트처럼 붙어 다니며 규모와 범위를 키웠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을 바다에 던져 은폐한 경찰은 반민특위에서 친일 혐의로 조사받았던 장본인이다. 친일이 제대로 단죄됐다면 17세 어린 학생이 최루탄에 눈에 박혀 죽었을까. 친일 청산이 제때에 제대로 이뤄졌다면 서울대생 박종철, 연세대생 이한열의 죽음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68년 전 오늘 아침 발생한 반민특위 와해는 과거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에게 가장 나쁜 해악을 끼쳤는데도 처벌받지 않는 나라의 현주소를 살펴보자. 법을 어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풍토, 여야와 정치 성향을 떠나 고위직에 오를 정도의 위치라면 자격증처럼 따라다니는 위장 전입과 세금 탈루, 병역 면탈…. 잘못된 사회 구조와 늑장 대응으로 인해 수백 명의 아이들을 죽게 만든 세월호 참사의 조사 과정도 반민특위와 공통점이 많다. 예산을 자르고 활동시한을 단축하며 조사 위원회에 들어와 딴짓하는 행태까지 닮은 꼴이다.

어디 세월호 뿐일까.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던 국무총리 후보자도 있었다. 미군과 약속을 지키려고 제 나라 국민을 속이는 꼼수를 부리고 대통령에게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는 군인의 가치관까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탓이다. 관용의 나라 프랑스에서 나치 부역자들을 용서하자는 주장이 나올 때 알베르 카뮈는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할 수 있는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라고 역설해 숙청을 이끌었다.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가 활짝 피기를…. 더 이상 망각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으면 좋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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