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토르데시야스 조약…지구를 반씩 나눠 먹다






1494년 6월 7일 스페인 북부 포르투갈 접경 도시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신항로 발견과 식민지 개척을 놓고 경쟁하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조약을 맺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의 골자는 영토 조정. 대서양 한가운데를 기준으로 삼아 새로 발견되는 땅의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하기로 했다. 분할의 기준선은 카보베르데 곶. 경도상으로 서경 43도 37분을 기준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선을 쫙 그었다. 대서양만 나눈 게 아니라 지구 전체를 반으로 갈랐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그은 선은 북극에서 내려와 대서양을 둘로 가르고 남미 대륙을 질러 다시 대서양으로 나와 남극 대륙에 꽂혔다. 조약에 따르면 유럽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 전체가 포르투갈의 땅이다. 중국과 한국, 북해도 일부를 제외한 일본도 포르투갈령에 속한다. 나머지는 전부 스페인의 차지. 유럽 대륙 서남쪽의 두 나라는 제멋대로 지구를 쪼갰을까. 그렇지 않다. 로마 교황의 권위를 빌렸다. 미지의 땅이면 일단 차지하고 본다는 서구 특유의 정복욕도 조약의 배경. 이슬람과 전쟁을 위한 가톨릭 국가끼리의 연합과 혼맥, 왕위 계승 문제도 복잡하게 얽혔다.

조약의 시발점은 1479년 맺어진 알카코바스 조약. 당시까지 스페인 지역이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 그라나다 왕국과 전쟁, 가톨릭 국가인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마무리한 이 조약에서 포르투갈은 카나리아 제도 이남에서의 항해와 식민지 개척의 독점적인 권리를 얻었다. 포르투갈은 1481년 교황 식스투스 6세에게 이 조약을 확약까지 받았다. 교황청도 포르투갈에 특혜를 베푼다고 여기지 않았다. 포르투갈 외에는 딱히 나설만한 국가도 없었다. 스페인 제국의 모태인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이슬람 축출 전쟁(레콩키스타)에 매달렸고 섬나라 영국은 백년전쟁(1337~1453)의 후유증 속에 왕위를 잇기 위한 장미전쟁에 빠져 있었다.


포르투갈은 이미 신항로 개척에 투자해 성과를 올리고 있던 상황. ‘항해왕’이라고 불렸던 엔리크 왕자(1394~1460)의 활동 등으로 포르투갈은 앞서 나갔지만 1492년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연초 이슬람 축출을 완수하고 10월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앞세워 미 대륙까지 발견한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스페인)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늦게 바다에 뛰어든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두 나라는 대서양 곳곳에서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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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는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중재를 요청, 1493년 교황 자오선이 그어졌다. 포르투갈은 여기에 불만을 품고 1년 넘게 이의를 제기한 끝에 새로운 조건(대서양 상의 경계선을 서쪽으로 약 1,300㎞ 이동)을 내걸었다. 스페인이 이를 받아들여 두 나라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었다. 사상 처음으로 인위적인 경도를 기준 삼아 영역을 나눈 교황 자오선과 그 개정안인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나라는 포르투갈. 동방무역에 집중 투자해 최대 교역품인 인도산 후추를 독차지하며 부를 쌓았다.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중남미 대륙에서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쓰는 것도 이 조약의 산물이다. 포르투갈이 1500년 발견한 브라질의 끝자락이 조약의 동쪽 경계에 위치해 어려움 없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반면 알렉산드리아 항구나 육로를 통한 이슬람권과의 제한적인 교류로 향신료 시장을 지배해온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쇠망의 길을 걸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 35년 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태평양까지 나눠 먹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 당시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태평양에서도 경계가 필요하다며 1526년 4월, 스페인 사라고사(Zaragoza)에서 조약을 맺었다. 이번에도 종교가 끼어들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주선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경쟁을 종교 권력이 중재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평화를 가져왔을까. 그 반대다. 평화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서 초기에만 지켜졌을 뿐이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경계를 나누는 종착점이 아니라 본격적인 해상 경쟁을 알리는 예고탄이었다. 포르투갈의 동방무역권은 얼마 안 지나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빼앗아갔다. 후발 해양국가인 영국의 국왕 헨리 8세가 영국국교회를 세워 가톨릭과 결별한 원인이 교황이 중재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기득권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서양 정치사상과 국제법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같이 식민지 개척에 늦게 뛰어든 경쟁자들은 힘과 논리로 선두주자를 잡으려 애썼다. 1588년 영국 함대와 스페인 무적함대가 싸운 게 물리적인 주도권 경쟁의 대표적 사례다. 근대 자연법의 창시자이자 국제법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가 논리로 싸운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사학과)의 저서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에 따르면 그로티우스가 1625년 내놓은 ‘전쟁과 평화의 법’은 국제법의 원리를 세운 명저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초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유럽 국가들에 의한 식민지 침탈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그로티우스가 1609년 ‘자유로운 바다’를 저술한 이유에도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독점권을 타파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로티우스는 이 책에서 ‘바다 자체나 항해의 자유는 점령이나 교황의 수여, 시효나 관습 등에 의해 일방적이거나 배타적인 권리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놓고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부인한 것이다. 바다의 재산권은 자유의 영역에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그로티우스는 땅에 대한 경작권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 땅의 재산권은 경작하는 개인만이 가질 수 있다며 경작을 하지 않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을 유럽인이 차지하는 행위를 정당화했다. 강탈에 대응하는 또 다른 강탈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국제법의 근간이 된 아이러니라니.

사상 처음으로 경도를 기준 삼아 영토를 갈랐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책에만 남아 있지만 지구촌에는 위도와 경도 기준으로 갈라진 곳이 지금도 존재한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책상 위에서 위도나 경도로 국경이 결정된 아프리카에서는 지역 간·종족 간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타의에 의한 분단과 단절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원하지 않았던 남북 분단 역시 38선에서 시작됐다. 분단 72주년, 우리는 과거보다 나아졌을까. 전진과 후퇴가 끊임없이 밀고 당긴다. 역사에 가림막을 씌우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부당한 구조를 깨기 위한 힘과 논리가 절실하다. 후발주자들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력하게 만든 것처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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