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문봉선 화백의 묵향 더한 김훈의 '남한산성'

학고재, 100쇄 기념 스페셜 에디션 내놔



거칠한 질감의 종이 위해 검은 먹으로 길을 냈다. 먹을 켜켜이 쌓아 올리는 점묵법으로 그려진 길은 시작도 끝도 가늠하기 어려운, 갈 수 없는 길이자 가야 할 길이다. 마른 붓으로 그려낸 잡초 속에 짙은 혼돈이 깔려 있는 이 벌판은 문봉선 화백이 ‘남한산성’을 읽고 상상한 길. 문봉선 화백이 묵향을 더한 남한산성 100쇄 기념 아트에디션의 표지화다. 문 화백은 총 27점의 수묵화를 그려 책에 담았다. 표지화인 길 그림을 제외한 대부분의 풍경은 모두 현지답사를 통해 실제 장소를 화폭에 담았다.

소설 ‘남한산성’이 처음 세상에 나온 지 꼭 10년만이다. 김훈 작가는 아트에디션의 후기를 통해 “문 화백과 그림에 관해선 일절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문 화백의 그림이 나의 소설을 설명하거나 부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글과 길을 고민했던 나의 내면의 풍경을 그대로 담은 그림을 그려줬다”고 했다. 김 작가는 후기에서 남한산성 출간 후 겪었던 고 김대중 대통령과의 일화도 소개했다. ‘남한산성’ 탈고 후 몇 년 뒤 초겨울에 전라남도 해남 우수영에서 열린 명량대첩 축제에 구경 갔다가 목포역에서 서울행 KTX에 올랐는데 김 작가가 열차에 타는 것을 본 대통령 일행이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전했고 대통령이 직접 김 작가에게 만남을 청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 대통령은 김 작가에게 남한산성의 인물 김상헌과 최명길 중 어느 편인지를 물었고 김 작가는 “작가는 아무 편도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김 작가는 “나는 최명길을 긍정한다. 이건 김상헌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는 김 대통령의 말을 전하며 “불굴의 민주투사 김대중이 주화파 최명길에 대해서 그토록 긍정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소회를 남겼다. 이 소설에서 김상헌은 ‘살기 위해서’ 죽음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살기 위해서 길을 열어야 한다는 최명길과 대치하는 인물이다.



7일 서울 청운문학도서관에서 열린 100쇄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도 김 작가는 “이 글은 말과 길에 대한 얘기일 뿐 이 소설에서 역사 담론을 만들어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며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등장인물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려는 생각도 전혀 없고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조건들, 시대·말·관념·인간의 야만성 등과 인간의 삶이 빚어내는 환경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도 관념에 사로잡힌 한국 사회를 비판했다. 김 작가는 “소설에서 가장 나를 괴롭힌 게 언어와 관념의 문제인데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까지 계속되고 있다”며 “조선시대 못지않은 관념의 늪에 빠져있다”고 개탄했다. 그가 문제 삼은 대표적인 사례가 대선과정에서 불거진 주적 논란이다. 김 작가는 “‘북한이 주적이냐 아니냐, 국가냐 아니냐’는 썩어빠진 질문, 관념에 빠진 질문”이라며 “북한은 군사적 실체고 주민을 장악한 정치적 실체이며 우리에겐 싸움의 대상이자 대화의 대상인데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지하고 몽매한 관념이 여전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 “이런 질문을 벗어나야 현실이 보인다”며 “정의니 불의니 도덕이니 하는 이런 모호한 관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남아있다”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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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이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에서 열린 ‘남한산성 100쇄 기념 아트에디션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소설가 김훈이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에서 열린 ‘남한산성 100쇄 기념 아트에디션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드 배치를 둘러싼 동북아 3개국의 긴장상황에 대한 해법을 묻는 질문에는 “이런 데는 정돈된 견해가 없다”면서도 “약소국가로서 강대국 틈에 끼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라며 운을 뗐다. 김 작가는 “병자호란 때 항복하고 군사적 외교적 주권을 포기하고 여자들을 청나라에 바치고 200년 이상을 살았던 역사는 치욕스러운 역사지만 인간의 역사가 영광과 자존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대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조선 시대의 사대라는 것은 약자가 강자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술로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올해 칠순을 맞은 김 작가는 앞으로 서너 권의 책을 더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 작가는 “역사나 시대의 무게를 벗어나 마음대로 글을 쓰고 싶다”며 “판타지라든지 상상의 세계로 끝없이 이야기를 끌고 나갈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문 화백과 김 작가의 인연이 화제에 올랐다. 김훈은 “남한산성 출간 이후 제법 돈을 벌어 문 화백의 ‘매화’를 구입했는데 원래 1,200만원짜리 그림을 문 화백이 깎아줘 700만원에 샀는데 지금 팔면 2,000만원”이라며 웃었다. 이날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한 문 화백을 대신해 손철주 미술평론가가 직접 들은 문 화백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소설이 펼치는 역사의 무거움을 마음에 새겼다. 제 그림은 여러 차례 현장답사를 통해 사실적 접근에 힘썼다. 계절은 혹독한 겨울이요 장소는 가파른 산성이라, 모진 악조건 속에서 옥죄이는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다. 먹의 깊이와 붓의 생동감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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