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루스벨트가 보호한 환경, 트럼프가 깨나?






1906년 6월 8일,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당시 48세) 미국 대통령이 고대 유물법(The Antiquities Act)에 서명했다. 4개 조문으로 이뤄진 고대 유물법 제정의 목적은 사적(史蹟·historical landmark) 보호에 있었다. 다만 여느 나라와 사정이 달랐다. 건국 130년 밖에 안된 나라가 변변한 유적이 있을 리 만무. 연방정부가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토지 중에 경관이 뛰어나거나 선사시대 유적지를 보호 대상으로 삼았다. 대통령에게 국가 기념물(National Monument)로 지정하는 권한을 줬다.

경제가 급속 성장하며 원주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온 미국이 자연환경 보호에 나선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째, 마구잡이식 개발에 대한 반성이 고개 들었다. 김수갑 충북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의 연구논문 ‘미국의 문화재보호법제에 관한 고찰(2001)’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이후 뉴멕시코 지역의 푸에블로 인디언 유적지에 대한 무차별적인 도굴과 유물 불법 수출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둘째, 민간 차원의 자발적인 보존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1892년 캘리포니아 북부와 캐나다 일대의 요세미티 계곡 보존을 위해 창립된 ‘시에라 클럽(Sierra Club)’은 개발과 병행하는 보호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보전’을 목표로 삼았다.

세 번째, 대통령의 의지가 강했다. 미국 산림청(U.S. forest Service)을 창설(1905년)하고 식목일도 처음 지정(1907년)할 만큼 루스벨트는 건강한 숲에 관심이 많았다. 루스벨트는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전신인 화학청까지 신설(1906년)할 정도로 국민 건강에 관심을 기울였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길 만 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환경 보호에 앞장섰다니. 루스벨트는 호전적이고 미국의 대외 팽창을 주도한 인물 아니던가. 맞다. “부드럽게 말하되 큰 몽둥이를 들어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라며 무력에 의존하는 ‘몽둥이 정책(Big Stick Policy)’을 주창한 인물이다.

해군성 차관 재임시 미국-스페인 전쟁이 터지자 차관직을 사임하며 의용기병대를 조직해 참전할 만큼 피가 뜨거웠고 모험과 사냥도 즐겼다. 세계를 상대로 미국의 힘을 뽐내려 포함 외교를 펼친 적도 있다. 대형 전함 16척(총톤수 22만 4,705t)에 흰색을 칠해 ‘대백함대(the Great White Fleet)’이란 이름을 붙여 1907년 말부터 15개월간 세계를 일주시킨 이후, 미국은 영국 다음, 독일에 버금가는 해군 국가로 인정받았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국의 참전을 주장하며 고령임에도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졸랐다. 자신은 전쟁터에 못 갔어도 아들 네 명을 모두 전쟁터에 보내 막내를 잃었다.


파나마 운하를 강탈하다시피 건설한 주인공도 루스벨트다.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이자 시장 옹호론자이면서도 루스벨트는 오늘날 시각으로는 좌파 정책도 적극 펼쳤다. 노동조합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위해 각종 노동시장 규제 정책을 선보였다. 무한정 뻗어 나가던 미국의 대기업에 대한 규제정책을 시행하고 독점에 철퇴도 휘둘렀다. 환경 보호 역시 사람들은 ‘카우보이 또는 돈키호테식 좌파 정책’으로 여겼지만 루스벨트로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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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지만 그는 평생 약점을 숨기고 살았다. 선천적으로 건강이 나빴다. 약한 체력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복싱에 매달려 한쪽 눈의 시력을 상실한 적도 있다. 루스벨트는 자서전에 “나는 툭하면 앓아눕는 아이였다. 선천적으로 기질이 약했다. 천식으로 고생했기에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을 찾아 요양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루스벨트의 폐가 온전히 작동한 곳은 길바닥이 포장되지 않고 사방이 녹색이던 숲이었다. 자연이 갖고 있는 치유의 힘에 대한 체험이 환경 보호에 앞장선 원인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반론도 있다. 자연 보호의 선구자적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실제로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진빈 경희대 교수(사학과)의 저서 ‘백색국가 건설사-미국 혁신주의의 빛과 그림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인류사를 인종 간 투쟁의 역사로 인식했던 그는, 미국인이 지구 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우수한 인종이라고 믿었다. 로마→게르만→앵글로색슨으로 이어진 당대의 가장 우수한 인종이,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에 와서 거친 자연과 원주민을 상대로 투쟁하여,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품종 개량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이 우수한 인종이 나약해지는 징후를 보였는데, 루스벨트는 그것이 지나친 도시화의 결과라고 판단했다. 미국인을 미국인으로 만든 거친 자연과의 투쟁 기회가 줄어든 것,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루스벨트는 공원이나 숲으로 캠핑을 가서 말을 타고 야생동물을 사냥하고 거친 자연을 경험하는 것이, 미국인의 야성을 깨우고 단련시켜 더 뛰어난 우성인자로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미국사 산책’ 시리즈 4권’에서 재인용)

무엇이 진실일까. 알 수 없다. 분명한 점은 결과다. 루스벨트는 재임 기간 동안 한반도 면적의 4,2 배에 이르는 93만㎢의 광대한 지역을 국가기념물로 지정, 난개발을 막았다. 와이오밍주에 위치한 높이 260m의 거대한 기둥인 ‘악마의 탑(Devils Tower)’이 그가 1906년 9월 첫 번째로 지정한 국가기념물이다. 루스벨트의 증손자 루스벨트 4세가 ‘기후 변화 지구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고손자(高孫子) 루스벨트 5세는 사업가 겸 환경보호운동가로 활약하고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 자신도 환경 보호주의자라는 이미지의 덕을 봤다. 1906년 러일전쟁의 종전협상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에도 환경보호 정책을 펼쳤다는 점 덕분에 반대 여론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과연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고의 환경보호주의자였을까. 글쎄다. 학계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더 쳐주는 것 같다. 자연에서 새로 발견된 종(種)에 사람 이름을 붙이는 생물학자들은 9종의 이름에 ‘오바마 ’를 붙였다. 이전 최고 기록인 루스벨트(7 종)보다 2종 많다. 더 늘어날 가능성도 크다. ‘트럼프 효과’라는 반사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26일 고대 유물법의 규정과 용도를 재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엄격한 국립공원 관리와 자연보호의 전통을 쌓아 왔던 미국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주목된다. 공화당 출신 주지사들은 오바마의 환경 규제를 철폐하고 개발에 나서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분위기다. 심히 걱정된다. 전세계 모든 국가와 약속한 파리 기후협약마저 못 지키겠다는 판이니 자국 내 국립공원은 어렵지 않게 갈아엎을 성싶다. 상원과 하원을 모두 공화당이 장악한 정치 환경도 루스벨트 시대와 비슷하다. 친일(親日) 성향이 강했던 루스벨트와 비슷하게 트럼프도 일본과 찰떡 공조를 과시하고 있다. 어째 그런 것만 닮아 가는지 모르겠다. 111년 세월도 무심하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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