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남촌 이야기

0915A39 만파




조선시대에 서울 사람들은 지역마다 생업이 각기 달랐다. 왕십리 미나리나 마포 새우젓, 이태원 복숭아처럼 지역마다 고유의 특산물이 존재했다. 지금의 중구 회현동 일대를 가리키는 남촌의 술도 북촌의 떡과 함께 대표적 명물이었다. 한때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로 양질의 술을 만들었던 듯하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남촌 술의 빛과 맛이 뛰어나 한 잔을 마시면 곧 취하고 술이 깬 다음에는 갈증이 나는 일이 없어 명주라고 할 만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청계천 이남의 남산자락을 일컫는 남촌(南村)은 예로부터 하급관리와 몰락한 양반이 사는 서울의 변방이었다. 북촌이 노론 위주의 현직관료들이 사는 곳이라면 남촌은 소론 등 재야 선비들의 주거지였으며 실학과 서민문학 등 대항문화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박지원이 단편소설 ‘허생전’에서 아내의 바느질품으로 연명하는 몰락한 양반으로 묘사했던 주인공 허생이 전형적인 남촌 선비다. 깐깐하면서 지조를 중시하는 남산골샌님이나 딸깍발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남촌 선비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북촌 권세가의 부정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유배까지 보내는 바람에 ‘남산골샌님이 자기 벼슬은 못 챙겨도 다른 이 벼슬 뗄 재주가 있다’는 속담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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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조선총독부가 남산에 자리 잡으면서 일본인 거주의 중심지이자 근대적 상가들이 줄지어 들어서는 상업지역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1926년 남산을 버리고 경복궁 자리에 총독부를 세우면서 식민지배의 심장부를 북촌으로 옮겨버렸다. 북촌이라는 오랜 정치권력의 중심지를 차지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확고한 지배력을 대내외에 과시하겠다는 의도였던 셈이다.

서울시가 남촌을 북촌·서촌에 버금가는 도심 명소로 재탄생시키겠다며 158억원을 들여 도시재생사업에 나선다는 소식이다. 남촌의 고유 술 브랜드를 개발하고 적산가옥·한옥 등 근현대 건축자산을 최대한 보존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북촌의 기세에 눌려온 남촌이 어떤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지 기대가 크다. /정상범 논설위원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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