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작업의 일환으로 판단했다. 또 회사 주주들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합병이 추진됐다는 점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진행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서 박영수 특검팀과 이 부회장 측의 법정 공방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9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조의연 부장판사)는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1심 판결문에서 “(삼성이) 삼성물산 주가를 낮게 유지해 이 부회장을 포함한 제일모직 주주에게 유리하고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한 합병비율이 나올 수 있는 합병 시점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는 합리적 의심을 가질 수 있다고 확인했다.
재판부는 더 나아가 “삼성물산은 2015년 5월13일 대금 약 2조원 규모의 카타르 복합화력발전소 공사를 수주하고도 공시하지 않았고 2014년 말부터 2015년 초 사이 주관하던 공사 일부가 삼성엔지니어링으로 넘어가는 등 삼성그룹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실적 부진을 유도하는 방법을 통해 삼성물산 주가를 낮게 유지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합병 반대 주주에게 삼성물산이 당초 제시한 매수청구가격(회사가 주식을 되사는 가격, 주당 5만7,234원)이 저평가돼 있고 적정 가격은 제일모직 상장 전일인 2014년 12월17일 시가를 적용해 6만6,602원으로 올려잡아야 한다고 판단한 지난해 서울고법 판결도 인용했다. 특히 “합병은 2013년 12월 옛 에버랜드의 제일모직 패션 사업부 인수에서 삼성물산 지주회사화 계획으로 이어지는 이 부회장 등 대주주 일가의 삼성 지배권 확립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이뤄졌다”고 적시했다. 삼성 측 주장과는 달리 합병의 목적을 승계로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또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하도록 개입한 문 전 장관 등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합병 방법이 잘못됐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다만 특검이 문 전 장관에게 구형한 징역 7년을 2년6개월로 크게 낮추면서 “외국 투기자본에 의한 국부유출 논란으로 국민연금이 ‘백기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여론도 상당했다”고 밝혔다. 방법에 문제는 있지만 삼성물산 합병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여지를 남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