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미국의 이완용, 베네딕트 아널드






‘대륙군에서 가장 빛났던 병사에게…나라를 위해서는 미국 독립전쟁 중의 결정적인 전투를, 그 자신을 위해서는 소장의 자리를 쟁취했다.’ 미국 뉴욕주 새러토가 국립역사공원의 장화 기념비에 적힌 내용이다. 장화 기념비는 1777년 가을 대륙군(미국 독립군)이 영국군에게 대승을 거둔 새러토가 전투의 영웅 4명 중 한 명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 호레이쇼 게이츠, 벤저민 링컨, 대니얼 모건 등 나머지 3명의 승장(勝將)들은 동상과 부조로 공원 곳곳에 이름이 남아 있다. 그런데 장화 기념비에는 ‘대륙군(독립군)에서 가장 빛났다던 병사’가 누구인지에 대해 단 한 줄의 설명도 없다.

웨스트포인트의 미 육군사관학교 뜰에도 이름 없는 명판(名板)이 있다. 독립전쟁에 참전한 모든 장군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이름 판을 새겼으나 딱 한 명의 명판에는 이름 대신 글자 몇 개만 새겨져 있을 뿐이다. ‘계급: 소장, 1740년생.’ 새러토가 공원의 장화 기념비와 웨스트포인트의 이름 없는 명판의 주인공은 동일 인물이다. 베네딕트 아널드(Benedict Arnold). 독립전쟁 초기 위명을 떨쳤던 장군이다. 대중 역사가인 케네스 데이비스는 저서 ‘미국의 운명을 결정한 여섯 가지 이야기’에서 아널드를 이렇게 평했다. “지휘와 전투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으며 적군과 아군을 막론하고 이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

아널드가 아니었다면 독립전쟁은 초기에 박살 났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기여가 컸다. 아널드는 대륙군이 최대 위기를 맞았던 1775년 가을에 결정적인 전공을 쌓았다. 영국이 3만 2,000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뉴욕에 상륙시켰던 상황. 대륙군 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연전연패하며 펜실베이니아까지 물러났다. 영국군의 추격에 직면한 아널드 준장은 샘플레인 호수에서 기상천외한 작전을 펼쳤다. 갑자기 나무를 베어 10여 척으로 구성된 소형 함대를 만들고는 수상 방어선을 깔았다. 영국군은 제대로 된 함대를 만들어 아널드의 막무가내식 소함대를 간단히 물리쳤다.

하지만 영국군은 시기를 놓쳤다. 아널드의 급조 함대를 돌파할 배를 만드는 4주 동안 눈이 내리고 강이 얼어 대륙군의 퇴각이 쉬어졌다. 결국 영국군은 기지 안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캐나다로 돌아갔다. 만약 아널드가 4주 동안의 시간을 벌지 못했다면 영국군은 대륙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뉴잉글랜드에 주둔지를 마련했을 것이고, 독립전쟁은 그걸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독립전쟁의 분기점인 새러토가 전투에서 아널드는 눈부신 분전(奮戰)을 펼쳤다. 1차 전투에서는 사령관인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돌격을 감행, 영국군의 진격을 막았다.

사령관인 게이트 소장은 아널드 덕분에 1차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명령 불복종의 죄를 물어 막사에 가뒀다. 2차 전투가 시작되자 아널드는 막사를 탈출해 전장으로 달려나가 병사들을 지휘하며 승리를 따냈다. 결국 새러토가 전투에서 영국군 사령관 비고인 장군이 항복했다. 본격 참전을 저울질하던 프랑스는 새러토가 전투 이후 지원병을 보내는 형식으로 참전, 독립전쟁의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새러토가 전투에서 영국군이 아널드에게 우회 진격로를 봉쇄 당하지 않았다면 독립전쟁은 프랑스가 본격 참전하기 전에 종결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차례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동안 아널드는 개인적 아픔도 적잖게 겪었다. 연거푸 다리에 총을 맞아 왼쪽 다리가 5㎝ 짧아졌다. 아널드가 전투를 치르는 동안 병약했던 아내는 병상에서 죽었다. 아널드는 국가를 위해 헌신했는데도 정당한 평가와 공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여겼다. 승리는 다른 장군들이 전공으로 가져가고 훈장이나 승진은커녕 온갖 구설수에 시달렸다. 강압적인 부대 운영과 월권, 공공기물 유용 등에 관한 진정과 투서도 많았다. 조사 결과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개인 빚을 얻어 부대를 운영한 사실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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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를 둘러싼 진정서와 투서는 무고가 많았다는 점이 밝혀졌어도 상급 지휘관들은 그를 싫어했다. 조지 워싱턴 사령관만 그를 아꼈을 뿐이다. 공적과 나이가 가장 많은 소장 진급 후보자였지만 수차례 물먹었던 이유도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급과 보직이 제대로 안 풀리는 상황에서 빚도 늘어갔다. 37세 때 재혼한 페기 시펜(당시 18세)의 씀씀이가 컸던 탓이다. 독립이 아니라 영국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왕당파 가문 출신이었던 페기 시펜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아널드는 차츰 변해갔다. 소장으로 승진하고 전략 요충지인 웨스트포인트 지역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된 직후부터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미국을 배신하기로.

웨스트포인트를 영국군에게 넘겨주려는 책략은 오래 못 가 들통 났다. 아널드의 편지를 소지한 영국군 정보장교 안드레 소령이 대륙군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반역 음모가 탄로 난 아널드는 영국군 진영으로 도망쳤다. 영국은 그를 영국 육군 준장에 임명하며 뉴욕 전선으로 보냈다. 대륙군의 맹장으로 영국을 상대하던 아널드의 처지는 180도 바뀌었다. 영국군 장군으로 대륙군과 싸우는 동안 전적은 신통치 않았다. 영국군 사령관은 그의 제안을 번번이 묵살하거나 물리쳤다. 부하들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당시 영국 육군 준장 가운데 유일하게 소장으로 진급하지 못한 채 아널드는 쓸쓸하게 군복을 벗었다.

아널드는 배신의 대가로 일시 보상금 6,315달러와 평생 연금 360 파운드를 받았다. 큰 돈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 13개 주가 독립을 선언한 1776년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가 귀족 가문으로부터 받은 최고액의 평생 연금이 300파운드였다. 당시 360파운드는 임금 상승률을 기준 삼았을 때 요즘 가치로 약 8억 원에 해당된다. 결코 작지 않은 돈이었으나 아널드는 더 많은 것을 바랐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군대에 지원하는 등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으나 환영받지 못했다. 말년의 그가 주력했던 것은 원래 직업이었던 상업과 무역. 독립전쟁이 터지기 전에 약국 운영과 서인도 제도와의 무역으로 재산을 축적, 몰락했던 가문을 일으켜 세웠던 그는 늘그막 사업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건강도 나빠졌다. 독립전쟁에 나섰을 때부터 시작된 통풍과 수종(水腫)이 말년을 괴롭혔다.

임종 직전 나흘간의 정신 착란 상태에서 ‘시신에 대륙군 장군의 옷을 입혀 달라’는 유언도 남겼다는데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사망일. 1801년 6월 14일 60세 나이로 죽었다. 영국에서는 별로 기억할 게 없는 존재인 베네딕트 아널드는 미국에서는 잊혀지지 않는 인물이다. 독립전쟁 직후 벤저민 프랭클린은 ‘유다는 한 사람(예수)만 판 반면 베네딕트 아널드는 300만 명을 팔아먹었다’는 말을 남겼다. 남북전쟁 직전 북부가 떨어져 나가려는 남부를 비난할 때는 ‘베네딕트 아널드 같다’고 몰아붙였다.

요즘에도 ‘아널드’라는 이름은 미국 사회에서 배신의 대명사로 통한다. 미국인들은 기업을 해외로 이전하거나 아웃소싱을 추진하는 기업,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조세 피난처(Tax Haven)로 서류상 주소지를 옮기는 미국 기업을 가끔 이렇게 부른다. ‘베네딕트 아널드 기업(Benedict Arnold Cooporations).’ ‘매국노 기업’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 날이 갈수록 대립이 심해지고 양극으로 흐르는 미국 정치권도 ‘베네딕트 아널드 때리기’에는 여야가 없다. 한국의 역사로 치자면 ‘초전에는 이순신, 막판에는 이완용’이었던 베네딕트지만 편 드는 사람이나 정당은 한 군데도 없다.

베네딕트의 배신을 결코 잊지 않는 미국이 한국에게는 ‘잊으라’고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과 미국, 일본을 잇는 삼각 안보체계가 다급해서인지 미국은 최근 몇 년 동안 억지로 한국과 일본을 화해시키는 정책을 펼쳐왔다. 지난 2015년 말 한일위안부협정 체결도 이런 구도와 무관하지 않다. 일부 미군 장성들은 ‘한국이 역사에 얽매여 있다’는 불만을 대놓고 말한 적도 있다. 미국에 묻고 싶다. ‘베네딕트 아널드를 용서할 수 있냐?’고 아널드가 300만명을 팔아먹었다면 이완용 등 친일 변절자들은 1,800만명의 동족을 팔아먹었다. 미국인들은 아널드를 응징하고 단죄한 반면 한국에서 역적 모리배의 자손들은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미국의 변절자 베네딕트 아널드를 보면 한국의 오늘날이 보인다. 조상의 수치와 한을 잊은 민족에게 내일이란 없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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