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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되는 충남 서산] '백제 사찰' 숲길따라 피톤치드 듬뿍...'바다 품은 암자' 낙조 보며 시름 싹~

'충남 4대 사찰' 개심사 주변

소나무 숲 우거져 시원함 만끽

무학대사가 깨달음 얻은 간월암

갯벌·일몰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

개심사로 올라가는 길에 자리한 오래된 나무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더위를 식혀 준다.개심사로 올라가는 길에 자리한 오래된 나무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더위를 식혀 준다.




개심사로 향하다 보면 얕은 개울을 만날 수 있다.개심사로 향하다 보면 얕은 개울을 만날 수 있다.


막연한 기대로 들뜨기도 하고, 바라던 일이 물거품이 된 상황 속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이 생기고, 그간 몰랐던 사실들로 삶이 풍성해지는 것.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충청남도 서산을 찾아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가장 기대했던 일은 청벚꽃을 보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다는 청벚꽃을 보기 위해 해미 나들목(IC)을 빠져 나오면 바로 보이는 해미읍성을 지나 개심사로 먼저 향했다.

국내에서 벚꽃이 가장 늦게 피어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 개심사는 다른 지역의 벚꽃이 다 지고 난 4월 하순에서 5월 초가 돼서야 꽃이 활짝 핀다. 이미 5월의 절반을 넘어 찾은 탓에 청벚꽃이 화려한 시기를 마감하고 내년 봄을 위해 깊은 잠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슨 욕심인지 눈앞에서 화려하게 피어 있는 청벚꽃을 볼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대한민국 대표 벚꽃 명소인 개심사로 향하는 곳에 있는 크지 않은 식당만이 개심사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대감이 컸던지 “이미 벚꽃은 다 졌어요”라는 식당 주인의 말에 발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발길을 돌리기에는 개심사가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개심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 간판에는 ‘충남 4대 사찰 중의 하나로써 백제 의자왕 14년인 65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해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처능대사에 의해 중수됐다고 전하고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보물 143호인 대웅전에 대한 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한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그 작법이 미려해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몇 번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설명이었지만 한 번쯤은 구경할 만하다는 생각에 뜨거운 볕을 정면으로 맞으며 산길을 올랐다. 비록 화려한 벚꽃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뜨거운 태양을 가려 주는 소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들로 더위를 느끼지 않으며 오를 수 있었다. 나무들로 우거진 숲에 시선이 뺏겨 걷다 보니 어느덧 개심사에 이르렀다. 화려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사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은 소소한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세종 3년(1421)년에 완성된 해미읍성.세종 3년(1421)년에 완성된 해미읍성.


1790~1880년 사이 천주교 신자들은 회화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매달려 고문을 당했다고 전해진다.1790~1880년 사이 천주교 신자들은 회화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매달려 고문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산림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듬뿍 마신 탓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개심사에서 30분 차로 달리자 충남 서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자 고창읍성·낙안읍성과 함께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인 해미읍성에 도착했다.


조선 태종 14년에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기 시작해 세종 3년(1421년)에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는 해미읍성은 높이 5m, 둘레 약 1.8㎞로 동·남·서 세 방향에 문루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79년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병사 영의 군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근무한 곳이기도 한 성은 왜구의 침입을 받지 않은 탓에 외벽의 형태가 온전히 보전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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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 역시 수백 년 동안 역사의 현장을 지켜 온 고목들이 잘 보존돼 있다. 그중 성 안 가운데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300년 이상 돼 보이는 회화나무였다.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오라고 손짓하듯 바람결에 나뭇잎은 흔들렸다. 가까이 다가가 나무 앞에 적혀 있는 설명을 읽었다. ‘1790~1880년 사이 천주교 신자들은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매달려 고문을 당했다’고 쓰여 있다. 고문의 흔적이 묻어 있는 가지는 폭풍으로 부러져 그 흔적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느낀 고통은 나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 보였다. 무언가의 힘에 이끌린 듯 넋 놓고 나무를 바라보고 있자니 시간이 한참 지났다.

간월암 낙조.간월암 낙조.


물에 빠져 뭍이 된 간월암.물에 빠져 뭍이 된 간월암.


마지막 여행지인 간월암 주변에 차 있던 바닷물이 빠질 시간이었다.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면 섬이 되고 빠져나가면 다시 뭍이 되는 간월암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작은 사찰이다. 무학대사가 ‘달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간월암(看月庵)이라 불리는 사찰 주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간월암과 물 빠진 간월암 주변 갯벌에서 고동과 소라를 줍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간월암 앞마당에 있는 200년 된 사철나무, 노랑 아기톱풀, 소사나무, 가자니아, 분꽃나무 등 간월암 내부도 주변의 아름다움과 잘 어울린다.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해 기대했지만 날씨가 흐려진 탓에 붉은 낙조의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이곳에서 4년 넘게 수행하고 있다는 스님이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된 낙조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정도 낙조는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흐린 날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보는 것 역시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글·사진(서산)=박성규기자 exculpate2@sedaily.com

박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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