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정책

황영기 "은행, 펀드운용 맡으면 증권·운용사 궤멸...팽창·독식 막아야"

[서경이 만난 사람]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

은행·운용사 업무 DNA 달라...금융 선진국서도 운용·판매 분리

금투업계도 판매 수수료만 몰두...고객 신뢰 구축 실패한점 반성을

벤처 성장 밑거름 될 'K-OTC 프로' 등 사적자본시장 육성 필요



연일 이어지는 일정과 오래 지속된 이슈에 지칠 만도 한데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의 발언은 매섭다. 지난달 21일 황 회장과의 인터뷰는 예정된 시간보다 늦춰졌다. 실무팀에서 작성한 인터뷰 답변을 두 번이나 재작성을 지시했다. “숫자가 틀렸다, 용어 선택이 잘못됐다”며 인터뷰 도중에도 꼼꼼히 챙기는 황 회장의 성격 탓인지 인터뷰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새 정부 들어 각종 경제정책 관련 모임에 참석하며 정책 제언을 하고 있는 황 회장은 이날 인터뷰에도 ‘검투사’라는 별명답게 작심 발언을 잇따라 쏟아냈다.

‘기울어진 운동장’론으로 최근 강하게 은행권을 비판했던 황 회장은 이날 은행권뿐만 아니라 낡은 규제 체계를 고수하는 정부와 오너의 이익 증대에만 혈안이 돼온 기업들까지도 쓴소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역시 새 정부 출범에 대한 기대감이 큰 탓일까. 단순히 금융투자협회 회장이 아니라 40년 가까이 현장에서 기업과 경제의 발전을 고민한 금융인이자 기업인으로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났다.


/대담=김현수 증권부장 hskim@sedaily.com

황 회장은 우리금융지주와 KB금융지주 회장을 지냈다. 금융지주 두 곳의 회장을 지낼 정도로 은행과 인연이 깊다. 하지만 그는 친정을 감싸기보다 오히려 더 신랄하게 은행을 비판한다. 이날도 그는 은행을 향한 쓴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황 회장은 “은행권은 스스로 구조조정 하는 능력이 없이 팽창만 계속해왔다”며 “펀드를 팔기 시작하고 방카슈랑스를 도입했다가 마지막으로 자산운용업까지 진출하겠다는 욕심을 부린다”고 꼬집었다. 인력조정·비용절감에 나서기보다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해왔다는 지적이다. “은행이 펀드 판매에 운용까지 맡게 되면 증권업과 자산운용업은 궤멸하게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은행과 운용사는 DNA 자체가 달라 금융선진국들 역시 여전히 펀드 운용과 판매가 따로 이뤄지고 있다고 황 회장은 설명했다.

금융투자업계와 은행은 이 같은 ‘전업주의’와 ‘겸업주의’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은행이 펀드 운용을 하듯 여러 가지 업무를 겸업하게 할지, 각자 고유의 업무를 나눠 영위하도록 할지에 대한 논란이다.

황 회장은 이 같은 논란에 돌직구를 던졌다. 그는 “(은행을 보유한) 금융지주회사 쪽에 겸업주의에 대한 입장을 물어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금융지주회사 체제를 통해 은행·증권사·운용사·보험사를 모두 거느렸으면서도 왜 겸업주의를 주장하는지를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황 회장은 “은행이 자산운용업까지 진출하게 되면 대한민국 금융의 패러다임은 통째로 바뀌게 되고 금융투자업계는 사활을 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황 회장은 신탁업법 분리 제정, 법인지급결제 허용 등 당장 시급한 업계 현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황 회장은 “신탁업을 활성화하고 다양한 상품을 선보이는 데는 100% 동의하지만 신탁업법을 별도로 분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증권사도 신탁업을 영위하는 만큼 신탁업법 제정안이 아니라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탁업은 투자자의 재산을 수탁자가 운용·관리하는 서비스다. 은행의 주장대로 신탁업법을 따로 제정하게 되면 사실상 자산운용업에 진출하는 셈이라는 것이 금융투자업계의 우려다.

기업에 대한 자금 송금·이체 등을 뜻하는 법인지급결제에 대해서는 “약속 위반의 문제”라는 입장이다. 증권사들은 지난 2007년부터 법인지급결제를 위한 특별참가금을 금융결제원에 지급해왔다. 그동안 지급한 금액이 3,375억원이지만 여전히 증권사의 법인지급결제는 허용되지 않은 상황이다. 법인지급결제는 투자은행(IB) 업무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인프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내 증권사들은 이 같은 기본적인 업무도 허용되지 않아 글로벌 IB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이다.


이 같은 이슈는 2월 하영구 은행연합회장과 벌인 설전의 주된 재료였다. 황 회장과 하 회장은 각자 ‘기울어진 운동장’과 ‘종합운동장’을 내세우며 맞섰다. 당초 은행에 유리하게 설계된 시장에서 증권사·자산운용사들은 불리한 게임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황 회장의 지적이었다. 그는 “국내 금융시장에서 은행은 ‘갑 중의 갑’”이라며 “은행 독식주의를 타파해야 금융시장이 동반 성장한다”고 이날 인터뷰에서도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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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회장은 금융투자업계 역시 “반성할 부분이 많다”고 밝혔다. 그는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대표 등이 운용하는 믿을 만한 펀드들도 있지만 판매 수수료만 노려 시류에 영합하는 펀드들도 있었다”며 “투자자의 돈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는 문화가 약해 고객과의 신뢰 구축에 실패한 점에 대해서는 처절한 반성이 이뤄져야 한다”고 토로했다. 삼성증권 사장 시절 황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가장 자주 던진 잔소리는 “고객의 눈물로 밥을 지어먹어서는 안 된다”였다.

한편 황 회장은 내년 초 임기가 끝난다. 벌써부터 연임이 점쳐지고 있지만 그는 임기 만료까지 자본시장 발전을 위한 과제로 사적 자본시장 육성에 몰두하고 있다. 조만간 문을 열 전문투자자용 장외주식 시장인 ‘K-OTC 프로’가 대표적이다. K-OTC 프로는 일반 개인투자자들이 장외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K-OTC가 부진하자 기관투자가들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만든 시장이다. 미국 정보기술(IT) 기업들은 나스닥 같은 공적 자본시장보다 K-OTC 같은 사적 자본시장에서 약 35배 많은 투자금을 조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들처럼 우리나라 벤처 기업들도 손쉽게 K-OTC 프로에서 성장을 위한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황 회장은 “지금은 성장성 좋은 벤처기업에 투자하더라도 기업공개(IPO)가 되지 않는 한 투자금을 회수(exit)할 길이 없어 사적 자본시장이 발전하지 못했다”며 “K-OTC라는 사적 자본시장의 인프라를 통해 유동성이 개선된다면 유통시장이 형성되고 사적 자본시장에 투자할 자금도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를 위한 조건으로 금융투자업계에서는 K-OTC 거래 주식에 대한 양도소득세 면제를 주장하고 있다. 황 회장은 “코스피·코스닥과 달리 K-OTC에서는 여전히 양도소득세(10%)라는 입장료가 붙는다”며 “투자자들이 이를 피해 사설 사이트에서 장외 주식을 거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리=유주희·서지혜기자 ginger@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He is…

△1952년 영덕 △1971년 서울고 졸업 △1975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81년 런던정경대 석사 △1975년 삼성물산 경공업사업본부 입사 △1982년 뱅크트러스트 아시아담당 부사장 △1989년 삼성그룹 비서실 국제금융팀장 △1997년 삼성생명 자산운용본부장 전무 △1999년 삼성투신운용 대표 △2001년 삼성증권 대표 △2004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2008년 KB금융지주 회장 △2010년 차병원 총괄부회장 △2012년 법무법인 세종 고문 △2015년~ 한국금융투자협회장

유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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