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반출돼 미국으로 흘러갔던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 어보가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전용기에 실려 2일 국내로 돌아왔다.
종묘 정전과 영녕전에 봉안돼 있던 어보(御寶)는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을 위해 제작된 의례용 도장으로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이번에 환수된 어보는 한국과 미국 정부가 4년간의 공조를 통해 제자리를 찾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로 분석된다.
문정왕후 어보는 명종 2년(1547)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1501∼1565)에게 ‘성렬대왕대비’(聖烈大王大妃)라는 존호(尊號, 덕을 기리는 칭호)를 올릴 때 만들어졌다. 가로·세로 각 10.1㎝, 높이 7.2㎝이며, 거북 손잡이가 달린 금보(金寶)다.
현종 어보는 효종 2년(1651) 임금의 맏아들인 현종(1641∼1674)이 왕세자로 책봉됐을 때 제작돼 ‘왕세자지인’(王世子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재질은 옥이며, 문정왕후 어보보다 약간 더 크다.
두 어보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점에 외국으로 유출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미국인의 손에 넘어갔다. 그는 문정왕후 어보를 2000년 LA카운티박물관에 팔았고, 현종 어보는 판매하지 않고 소장하고 있었다.
앞서 미국 정부는 2014년 4월 고종 황제가 수강태황제로 받들어지는 의식을 치르는 것을 기념해 제작된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를 돌려줬고, 이듬해 4월에는 미국 시애틀미술관이 소장 중이던 덕종 어보를 우리나라에 반환했다. 덕종 어보는 성종이 1471년 죽은 아버지인 덕종을 기리며 제작한 것이다.
현재 조선왕실의 어보는 대부분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국립춘천박물관은 ‘단종금보’와 ‘정순왕후금보’, 국립중앙박물관은 ‘고종옥보’와 ‘명성황후옥보’ 등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이 만든 어보 375점 가운데 40여 점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 분실되고 훼손된 어보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상당수가 외국으로 유출됐다.
국립고궁박물관이 2010년 발간한 자료집 ‘조선왕실의 어보’에 따르면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어보는 1408년 만들어진 ‘태조금보’부터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순종에게 바친 ‘순종황태자 금보’까지 제작 시기가 다양하다.
지난해에는 문화재 수집가 A씨가 행방불명의 어보로 알려진 ‘장렬왕후옥보’를 미국 경매에서 구매해 국립고궁박물관에 판매하려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렬왕후옥보는 숙종 2년(1676) 인조의 비인 장렬왕후에게 휘헌(徽獻)이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어보다.
문화재청은 장렬왕후옥보가 정부 소유의 도난문화재인 데다 미국에서 불법적으로 유통됐다는 점을 들어 거래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A씨는 어보가 지정 문화재가 아니고, 구입 당시 도난문화재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선의취득이 인정된다며 어보 반환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장렬왕후옥보는 진품으로 확인됐다”며 “경매가 진행되기 전인 2015년에 이미 미국에 이 어보가 도난문화재임을 알렸으므로 경매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문화재청은 고려대박물관이 민간 기관 중에는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는 어보인 ‘원경왕후금인’과 ‘명성왕후옥보’에 대해서는 돌려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두 어보는 각각 1404년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 1676년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를 위해 제작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미국에서는 문화재에 대한 선의취득 자체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 어보를 돌려받을 수 있었고, 장렬왕후 어보도 같은 이유로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와 미국은 법체계가 달라 고려대박물관의 어보를 가져오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