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에 ‘이탈리아 여인’의 딸과 첫 결혼에서 실패. 27년 후 재혼.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결혼사다. 두 번째 결혼 상대는 22살 연하의 ‘이탈리아 여인’으로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 피로 얼룩진 초혼부터 보자. 앙리 4세의 초혼은 이사벨 아자니가 주연한 1994년 개봉작 ‘여왕 마고’(원작 소설 알렉상드르 뒤마)에도 나온다. 역대 프랑스 공주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다는 마그리트 드 발루아 공주는 동갑내기인 나바르 공국의 앙리 왕자와 1572년 결혼했으나 사랑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신부의 어머니이며 모후인 카트린 드 메디치가 벌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탓이다.
신교도 왕자와 구교도 공주를 결혼시켜 프랑스의 종교적 화합을 도모하려던 애초 목적과 달리 결혼식에 모인 신교도 귀족들이 학살당한 뒤, 앙리 왕자와 마그리트 공주는 사실상 남처럼 살았다. 권력을 휘두르던 카트린 모후가 사망하고 앙리 왕자가 앙리 4세로 등극(1589)한 뒤에도 둘은 이혼 조건을 둘러싸고 10년을 싸웠다. 결국 둘은 1599년 ‘마그리트의 왕비 신분 유지를 인정한다’는 조건 아래 26년간의 형식적인 결혼 관계에서 벗어났다. 이듬해인 1600년 앙리 4세는 22살 어린 25세 신부를 맞아들였다.
특이할 대목은 재혼 상대가 애초의 장모와 같은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 장모인 카트린 드 메디치와 신부인 마리 드 메디치는 나이 차 54년에 촌수가 멀었어도 메디치 가문이라는 점은 같았다. 앙리 4세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그토록 괴롭혔던 모후 카트린과 같은 집안에서 후처를 고른 이유는 돈에 있었다. 마리를 프랑스 왕비에 앉히기 위해 메디치 집안은 60만 크라운을 지참금으로 앙리 4세에게 바쳤다. 프랑스 역사상 최고액이었다는 마리의 지참금은 헤아리는 데만 두 달이 걸렸다.
재정을 정비하고 종교 내전으로 분열된 국론을 통일시켜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앙리 4세는 마리의 돈을 제대로 써먹었다. 막대한 부채와 이자에 시달리던 프랑스는 명재상 쉴리 공작을 내세운 재정 개혁과 적극적인 산업·농업 장려정책을 펼쳤다. 재정총감을 맡은 쉴리의 노력과 막대한 지참금으로 프랑스는 1607년께 모든 부채를 갚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며 연간 1,000만 프랑 이상의 현금을 국고에 쌓았다. 국민들의 삶도 펴져 일요일마다 닭고기와 야채에 포도주를 넣은 조림 요리인 ‘코코뱅’을 즐기는 음식문화가 생겨났다.
프랑스 왕국에는 다른 경사도 생겼다. 발루아 왕조의 혈통이 끊겨 등극한 앙리 4세에서 적통(嫡統)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앙리 4세와 마리는 결혼 후 9년 동안 3남 3녀를 낳았다. 다만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명군이었으나 끊임없이 새로운 여자를 찾았던 앙리 4세의 바람기 탓이다. 국민들의 존경을 받던 앙리 4세가 암살(1610년)당한 직후, 이탈리아 구교도 출신 왕비가 배후라는 설까지 돌았다. 여덟 살짜리 장남이 루이 13세로 왕위를 계승하자 섭정을 맡은 마리는 이탈리아 출신 귀족만 중용하는 등 국정 전횡을 일삼았다.
모후 마리는 갈수록 민심을 잃었다. 성년이 된 루이 13세가 1617년 친정을 선언하자 반란을 일으켜 1630년까지 아들을 괴롭혔다. 결국, 프랑스에서 추방된 마리는 자식들을 찾아 네덜란드와 영국을 전전하다 1642년 7월 3일 쾰른에서 67세로 생을 마쳤다. 모두가 경원하고 돈도 떨어진 마리를 마지막까지 돌봐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 거액을 후원받으며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연작 24점을 그렸던 루벤스는 은혜를 갚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마리를 돌보고 챙겼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마리의 육신은 벌써 흙이 됐지만 루벤스의 연작 그림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마리의 죽음으로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프랑스에 대한 영향력 행사도 끝났다. 대신 문화는 남았다. 식탐(食貪) 탓인지 비만에 가까워 ‘뚱뚱한 이탈리아인’으로 불렸던 마리는 돈뿐 아니라 요리사도 잔뜩 데리고 시집왔다. 카트린 드 메디치부터 이식된 이탈리아 피렌체의 궁정 문화, 즉 발레와 요리, 포크와 나이프 따위의 식탁 예절과 아이스크림, 고급 과자 등이 마리 모후 시대에 절정을 이루고 귀족 사회를 거치며 퍼진 끝에 프랑스 요리로 굳어졌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