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방송된 MBC 새 파일럿 프로그램 ‘셜록의 방’은 미궁에 빠진 과거 사건을 현대 첨단 과학수사로 추리하는 교양 프로그램. 육감이나 직감에 의존하는 범죄 스토리텔링이 아닌 타당한 증거를 통해 과학적 서스펜스를 선사하는 신개념 추리쇼를 표방한다.
‘셜록의 방’을 통해 1년 8개월 만에 MBC에 복귀한 정형돈은 수사반장으로서 진행을 담당했다. 직접 추리를 펼치는 수사원으로는 이특, 조우종, 지민, 딘딘이 출연했다. 각각 추리소설 애독자, 수사물 미드 애청자, 방탈출 게임 마니아 등을 어필하며 추리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신했다.
‘셜록의 방’의 정체성을 공고히 한 것은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반장이다. 권일용 반장은 강호순, 정남규, 유영철 등 희대의 살인마 사건 수사에 직접 참여한 프로파일링 전문가. 수사 방법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한 수사원들에게 진정한 과학 수사를 가르쳐주기 위해 출연했다.
이날 수사원들은 1994년 4월 일어난 ‘화투판 살인 사건’을 추리했다. 친구 3명과 화투를 치던 이영만이 사망하고, 그 옆에 의식불명 상태로 쓰러져있던 박철수 역시 병원에 실려 갔다가 사망한다. CCTV 확인 결과 현장에 드나든 사람은 이영만과 박철수를 포함한 4명뿐. 사망자 이영만을 제외한 3명의 친구들이 용의자다.
첫 번째 용의자 김미자는 사망한 이영만과 연인관계로, 중간에 귀가한 후 우울증 약을 먹고 잠들었다고 진술했다. 두 번째 용의자 황만식은 최초 신고자로, 이영만과 박철수가 싸우자 자리를 뜬 후 샤워하고 다시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마지막으로 박철수는 피해자이자 유일한 목격자. 병원에서 잠시 의식을 찾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 후 사망했다.
크게 복잡한 사건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건 브리핑과 요약 프로필 공개를 통해 네 인물의 행동 및 특징, 사건 개요가 반복해서 제시됐다. ‘셜록의 방’은 시청자들에게 혼란을 줘 예능적인 재미를 만들어 내기보다는, 시청자들이 사건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만든 후 과학 수사 방식을 알려주고 적용하는 것에 무게를 뒀기 때문이다.
수사원들은 우선 용의자의 프로파일링만을 바탕으로 용의자들의 관계를 추리했다. 여러 가설을 듣던 권일용 반장은 이를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에 따라 수사원들은 사건 현장에서 단서가 될 사진, 차용증, 약통 등을 증거물로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황만식이 김미자를 짝사랑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과학적 근거 없이 추측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권일용 반장은 사건 현장에 범죄자의 행동특성이 남아있다며 본격적으로 과학 수사를 시작했다. ‘화투판 살인 사건’에서는 현장에 남아 있는 혈흔이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됐다. 이 혈흔 형태를 분석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서영일 연구원이 초빙됐다.
서영일 연구원은 낙하 혈흔, 문지름 혈흔 등 혈흔의 형태에 따라 피해자의 자세, 가해자의 공격 방향 등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사원들은 이를 바탕으로 범인을 좁혀나갔다. 서영일 연구원은 발혈 지점 분석, 혈흔 줄 연결기법으로 가해자가 키 160cm 이상의 오른손잡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결정적으로 황만식 등에 남은 핏자국을 통해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혔다.
‘셜록의 방’은 살인 사건을 두고 범인을 추리한다는 점에서 JTBC ‘크라임씬’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크라임씬’은 짜여진 사건 속에서 플레이어들이 직접 가해자 및 용의자로 분해 범인을 추리하는 예능프로그램. 어느덧 시즌3까지 진행된 만큼 대표 추리 방송이 됐다. ‘셜록의 방’을 본 시청자들 중 ‘크라임씬’을 떠올린 이들이 결코 적지 않다.
‘셜록의 방’은 시사교양프로그램으로 분류된다. 사건 자체의 재미보다는 과학 수사 방식을 전달하는 것에 방점을 둔다. 복잡하고 흥미진진한 사건을 예상한 시청자들에게는 아쉬운 짜임새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 따라서 ‘셜록의 방’ 속 등장하는 사건과 그를 이루는 단서의 디테일을 더욱 살릴 필요가 있다. 교양방송이라고 하더라도, 예능인들을 수사원으로 불러온 만큼 유익함과 흥미를 동시에 잡아야 외면 받지 않는다.
개선할 점은 한 가지 더 있다. 앞서 언급됐듯이, 수사원들이 프로파일링과 현장 증거물을 바탕으로 추리할 때는 과학적 기법보다는 상상력과 촉에 의지하게 된다. 이 부분이 많은 분량을 차지할수록 ‘크라임씬’과 차별화되는 ‘셜록의 방’만의 장점은 더욱 흐려질 것이다. 단순히 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과학을 바탕으로 조금 더 날카롭게 추리하는 수사원들의 활약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셜록의 방’이 기대되는 점은 프로파일러, 국과수 연구원이 등장해 과학 수사 기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는 것. 이번 방송에서는 혈흔 분석만으로 사건을 해결했지만 이후 프로그램 예고에 따르면 지문 조각, 인체 분비물, 죽은 모기의 잔해 등 물리학, 수학, 생물학, 심리학을 총동원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쾌감은 물론 완전 범죄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범죄 예방 프로그램으로서의 역할도 할 계획.
‘타임 슬립’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도 기대 요인 중 하나다. ‘화투판 살인 사건’이 괜히 현재가 아닌 1994년을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다. ‘셜록의 방’은 과거의 기술로는 밝혀낼 수 없던 범인의 정체와 단서를 발전된 현대 과학수사 방식으로 추적, 묻혀버린 진실을 파헤친다는 설정. 이를 더욱 부각해 ‘타임 슬립 과학수사 추리쇼’라는 타이틀을 살린다면 미제 사건에 대한 관심을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셜록의 방’은 총 2회로 계획된 파일럿 프로그램. 다만 MBC에서 최근 여러 파일럿 프로그램을 정규로 전환한 만큼 정규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흥미로운 소재에 나름의 의미까지 더한 만큼, 남은 기회를 잘 살려 ‘셜록의 방’만의 경쟁력을 다지기를 바란다.
/서경스타 양지연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