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인술을 행하는 의사 선생님이 많은데 과분한 상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베풀어준 능력을 다시 돌려드리는 일은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순리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10일 JW중외제약(001060) 산하 중외학술복지재단의 ‘제5회 성천상’ 수상자로 선정된 한원주(91·사진) 여사는 “의료봉사는 의사의 길을 처음 걸을 때 맹세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도 나오는 이야기”라며 수상 소감을 짤막하게 밝혔다. 국내 최고령 현역 여의사로 불리는 한 여사는 요즘도 경기 남양주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 내과 과장을 맡아 소외계층을 돌보고 있다.
한 여사는 지난 1949년 서울여자의학대(고려대 의대 전신)를 졸업한 뒤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증을 받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내과 전문의 자격증까지 땄다. 9년간의 미국 유학까지 마친 엘리트 의사였지만 귀국을 선택한 뒤 1968년 서울 동대문구에서 병원을 열었다. 병원 운영 역시 탄탄대로를 달렸지만 한 여사는 53세가 되던 젊은 나이에 폐업하고 의료봉사의 외길을 걸었다.
“의사였던 부친의 영향이 컸지요. 병원이 문을 닫는 주말에 늘 의료봉사에 나서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의사라는 직업을 동경하게 됐고 덕분에 의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세상이 저에게 준 능력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개인병원을 닫은 한 여사는 1979년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부설 의료선교의원장에 취임하고 소외계층 진료에 투신했다. 이어 1982년에는 국내 최초로 환자의 정서나 환경까지 치료 영역에 포함하는 전인치유진료소(Total Healing Center)를 국내 최초로 열어 생활비와 장학금까지 지원하면서 소외계층의 자립을 도왔다.
전인치료진료소는 당시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현대인들의 질병은 신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환경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한 여사의 생각이었다. 질병만 치료해주는 것을 넘어 체계적인 상담으로 환자 개개인의 가정사와 생활 환경까지 돌보는 것이 전인치료진료소의 역할이었다. 국내 학계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한 여사의 열정적인 활동은 일본·싱가포르·독일 등에 소개되며 국제원조까지 받는 대표적인 사회공헌활동으로 소개됐다.
평생을 의료봉사에 투신한 한 여사는 78세이던 2004년 퇴직했다. 하지만 2008년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 내과 과장을 맡아 현역으로 복귀했다. 환자를 돌보는 것이 천직이라는 신념이 다시 청진기를 들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가 몸담은 의료봉사만 해도 탈북민, 서울 영등포 쪽방촌, 노숙자, 외국인 근로자, 해외 봉사 등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한 여사는 그간 수차례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도 고사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한 여사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기 위해 의사로의 소임을 다했을 뿐인데 뜻하지 않게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됐다”며 “앞으로의 여생도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힘을 더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낙 중외학술복지재단 성천상위원회 위원장은 “한 과장은 개인의 영달을 뒤로한 채 불우한 이웃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술을 베풀어왔다는 점에서 성천 이기석 선생의 생명존중 정신을 누구보다 훌륭하게 실천하신 분”이라며 “지난 38년 동안 이어진 의료봉사는 생명 존중의 혼을 담은 참의료인의 표상이자 양극화가 심화하는 요즘 의료 전문가들이 나아갈 가르침을 던져준다”고 말했다.
성천상은 JW중외제약 창업자인 고(故) 성천 이기석 선생의 생명존중 정신을 기려 음지에서의 헌신적인 의료봉사활동으로 사회적 귀감이 되는 의료인을 발굴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시상식은 오는 8월17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