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는 일은 매번 잘될 수가 없다. 잘나가는 때가 있고 꽉 막혀서 암울할 때가 있다. 정당도 여당으로 기세등등할 때가 있지만 야당이 돼 위세가 한풀 꺾일 수도 있다. 기업도 신제품 개발에 성공해 매출이 급상승할 때도 있지만 경영진이 각종 추문과 비리에 연루돼 연일 여론의 비판을 받을 때도 있다. 프로스포츠 선수도 펄펄 날며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때도 있지만 슬럼프에 빠져 쉽게 하던 동작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잘나가다 힘겨운 시절을 보낼 때 너무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자면서 즐겨 노자의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라는 말을 건네곤 한다. 여기서 반(反)은 지금과 반대되는 상태로 나아가거나 현재의 상태를 끝나고 또 다른 상태로 돌아가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즉 반은 하나의 단어로 반대되는 뜻과 돌아간다는 뜻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노자는 분명히 “반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라고 했으니 내가 지금 처한 상태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고 언젠가 다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만하다.
‘반자도지동’에 대한 이러한 통속적 이해가 완전히 틀린 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명백히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 노자는 도가 분명히 하나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반대의 상태로 바뀐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대로 돌아가는 움직임이 어떻게 일어나느냐와 관련해서는 반자도지동의 문장에서 별다른 설명이 없다. 그래서 반자도지동을 통속적으로 풀이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계절 변화에 주목한다. 봄과 여름에는 양기가 날씨를 주도하다가 하지를 정점으로 해 음기가 생겨나서 가을과 겨울이 되면 음기에 주도권을 내준다. 반대로 가을과 겨울에는 음기가 날씨를 주도하다가 동지를 정점으로 해 양기가 생겨나 봄과 여름이 되면 양기에 주도권을 내준다. 이렇게 양기와 음기의 교체는 기계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가을이 되면 양기가 음기에 주도권을 내어주기 싫다고 해도 그럴 수가 없고 봄이 되면 음기가 양기에 주도권을 내어주기 싫다고 해도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사물이 정점에 이르면 반드시 반대 상태로 나아간다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을 말한다.
사회에서 반자도지동과 물극필반은 어떻게 작동할까. 자연에서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사회에도 그대로 재연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열세에 처했을 때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그냥 조용히 있으면 우세의 현상을 맞이할 수가 있다. 즉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거의 ‘공짜로’ 좋은 날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통속적인 이해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열세에 처했을 때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기대 심리에 희망을 갖고 무임승차를 당연시하게 된다.
사회에서 반자도지동이 일어나려면 조건을 갖춰야 한다. 열세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열세에 놓이게 된 원인을 분석해 우세로 나아갈 수 있는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 변화는 추진만 한다고 곧바로 결실이 생기지 않는다. 정치는 국민의 지지를 받고 기업은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자신이 놓쳐 잘못한 환부를 도려내 새살이 돋아나야만 등을 돌렸던 국민과 소비자의 신뢰를 다시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열세가 서서히 우세로 바뀌어 가고 상대가 승리에 도취해 실수를 연발하고 비리를 스스로 정화할 수 없게 되면 드디어 우열 관계가 뒤바뀔 수 있다. 알고 보면 자연도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쉼 없이 천체 운동을 한 결과도 음기와 양기의 교체가 일어난 것이지 가만히 있는데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반자도지동이 일어나려면 반대 상태로 돌아가는 동력을 마련해야 한다. 이 동력은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달라져 주위 사람의 신뢰를 얻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이 하나도 바뀌지 않으면서 상황만 바뀌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반자도지동을 무임승차의 맥락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반자도지동을 바라며 말만 읊조린다면 그러한 결실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