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미국에서 생산됐거나 미국으로 수출했던 가전제품을 갖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제품 뒷면에 붙여진 제품 정보 스티커를 살펴보라. 굵은 테두리를 두른 동그라미 안에 알파벳 ‘UL’이 표시된 마크가 있다면 당신은 이 제품의 안전성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UL마크가 없다면? 제품을 사용할 때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UL코리아 본사에서 클라이드 코프만 UL 최고운영책임자(Chief Operating Officer)를 만났다. 그는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할 수 있는 UL에 대해 간략하지만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UL(Underwriters Laboratories)은 과학기술을 활용해 안전 규격을 개발하고 안전 인증 서비스를 제공 하는 기업입니다. 제품의 성능 시험부터 사후 심사, 교육 및 컨설팅까지 안전에 관련된 광범위한 서비스를 총망라하고 있죠. 전기 엔지니어였던 윌리엄 헨리 메릴(William H. Merrill)이 1894년 미국에서 설립했습니다.”
19세기 말에 안전에 대한 규격과 인증을 개발하려고 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UL의 역사는 1893년 개최된 시카고 세계 박람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카고 세계박람회장 곳곳에선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와 전기 시설물들이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시 박람회 화재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보험회사에서 파견한 전기 기술자가 윌리엄 헨리 메릴이었다. 그는 그 때부터 안전한 전기 사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1년 뒤인 1894년 시카고에 ‘Underwriter’s Electrical Bureau’라는 전기 안전 관련 회사를 설립했다. 1901년에는 사명을 지금의 UL로 바꾸고, 그 2년 뒤부터 안전 규격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은 대체로 전자제품에서 동그란 UL 인증마크를 볼 수 있지만, 사실 UL은 지구상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제품과 서비스 분야를 사업 대상으로 삼고 있다. 클라이드 코프만이 한국을 찾은 이유는 ‘배터리’ 때문이었다. 클라이드 코프만은 포춘코리아와의 인터뷰 전, 서울에서 열린 ‘배터리 안전 서밋(Battery Safety Summit)’에 참석했다. 배터리 안전 서밋은 배터리의 안전성 개선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UL이 2104년부터 열고 있는 행사다. 한국에서 개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행사에는 UL, 미국방화협회(NFPA), 아이다호국립연구소(INL), 삼성전자, LG화학, 롯데첨단소재,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의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클라이드 코프만은 말한다. “배터리 안전성 확보를 위한 표준 인증 프로그램 마련과 운송과정 중 배터리 수명에 대한 문제, 배터리의 미래 등에 대한 토의를 진행했습니다. 한국은 배터리 기술이 발달한 나라여서 토의가 매우 원활하게 이뤄졌습니다.”
UL은 민간기업이지만 미국 정부와 전 세계 시장에서 큰 신뢰를 얻고 있다. UL은 미국 연방 직업안전보건국(OSHA)이 인가한 안전 인증 업체다. UL이 만든 규격 대부분이 미국표준협회(ANSI)의 규격으로 인정받고 있다. 강제 규정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제품을 팔기 위해선 UL 규격에 맞는 인증을 받는 게 필수적이다. 안전에 민감한 미국 소비자들이 UL 인증마크를 전폭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이드 코프만은 규격을 ‘슈퍼 하이웨이’라고 표현했다. “규격은 순조롭고 빠르게 새로운 혁신기술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죠. 제품이나 기술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가드 레일’ 역할도 합니다. 규격이 있으면 기술의 변화를 제품이나 서비스에 체계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특히 안전 규격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품이 시장에 나올 경우, 제조사나 소비자 모두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며, 전동바퀴가 달린 스케이트보드 ‘호버보드(Hoverboard)’ 사례를 들려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호버 보드를 구매해 탔는데, 제품에서 화재가 일어났어요. 미국소비자안전위원회는 즉각 호버보드 판매를 중지시켰죠. 그리고 곧바로 UL에 제품 안전 인증 규격 개발 의뢰를 했습니다. UL의 규격이 만들어지고 안전한 호버보드가 생산된 후에야 판매금지가 풀렸습니다.” 클라이드 코프만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준비하자는 것이 UL의 철학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설명을 듣다 보니 민간기업인 UL이 오랫동안 시장에서 신뢰를 받고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클라이드 코프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새로운 형태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오면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UL은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아요. 오로지 과학적인 연구와 객관적인 데이터로 제품과 서비스의 안전성을 검토하고 연구하죠. 더 안전하고 성능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뿐이에요. 이 과정에 이해관계자들의 압력이나 제 3자의 의견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UL은 매우 독립적으로 일하고 있어요. 우리가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이유죠. UL의 신뢰는 직원들의 사명감과 일관성을 잃지 않는 정신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어요.”
최근에는 기술 발전과 시장 변화 등에 따라 안전의 개념이 진화하고 있다. 공기나 물의 질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도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UL은 제조사와 소비자들에게 보다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전기·전자 기기, 산업 설비, 건축 자재, 소비재를 넘어 환경 기술, 지속가능 에너지, 전자결제보안 등 새로운 분야로 비즈니스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 4월 UL은 다국적 의료기기 컨설팅 기업 ‘이머고(Emergo)’를 인수했다. UL의 목표는 효과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의료기기를 전 세계 환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클라이드 코프만은 말한다. “최근 의료기기 제조 업체들이 일본과 유럽의 인구 고령화와 중국, 브라질 등 신흥시장의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새로운 제품들을 속속 내놓고 있습니다. 이에 맞물려 의료기기 관련 규제도 늘고 있죠.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기기는 안전 규격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UL이 세계적인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이머고를 인수한 건 안전한 의료기기를 보급하는데 앞장서기 위해서입니다.”
UL은 전 세계 40개국에 1만 1,600여 명의 직원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더욱 복잡해진 글로벌시장에서 차별화된 안전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각국의 연구소, 기업, 무역협회, 국제 규격 관련 기구 등과도 긴밀한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클라이드 코프만은 인터뷰 말미에 UL의 사명(使命·mission)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UL은 지난 120년 동안 ‘보다 안전한 세상을 위해 일한다(Working for a Safer World)’는 사명을 지켜왔습니다. 이를 통해 얻은 UL의 명성과 신뢰도는 제조사와 소비자 모두에게 도움을 주고 있죠. UL은 한국에서도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겁니다.”
■ UL코리아는…
UL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 기술을 한국에 제공하기 위해 1996년 UL코리아를 설립했다. UL코리아는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시장 진출에 필요한 안전 인증을 정확하고 빠르게 취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국내 기업이 제품 설계부터 생산, 유통 단계까지 전 과정에서 UL의 안전 과학 기술을 적용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있다. 현재 UL코리아는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2,500여 곳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월트디즈니컴퍼니와 공동으로 제작한 ‘세이프티 스마트(Safety Smart®) 프로그램’을 디즈니 케이블 채널을 통해 내보내 어린이들이 안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생활 속에서 안전을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캠페인도 펼치고 있다. 그 밖에도 기업 대상 안전 교육을 실시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안전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