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여름 독일. 나치(Nazi·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가 활개쳐도 히틀러의 집권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반(反) 나치 진영은 두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첫째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당시 85세)의 존재.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각종 전투의 영웅인 힌덴부르크는 1932년 4월 치러진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53.1%를 얻으며 국민의 지지를 재확인했다. 히틀러는 선전했어도 36.7%에 그쳤다. 두 번째는 프로이센의 중도 좌파 사회민주당 정권. 영토는 독일 8분의 5, 경제력은 그 이상인 프로이센에서 사민당 정권에 대한 지지가 분명한 이상 히틀러가 중앙 권력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1933년 이후 독일의 역사는 익히 아는 대로다. 예상과 정반대로 흘렀다. 히틀러는 사실상 전권을 잡았고 독일과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빠져들었다. 무엇이 독일을 히틀러의 광기로 빠져들게 만들었을까. 1차 세계대전 패전의 후유증과 패배감, 극심한 물가고와 경제난을 겨우 벗어나려는 순간에 불어닥친 세계 대공황, 정치 혼란이 작용했다는 게 정설. 히틀러가 이런 약점을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1932년 시점에서 일어난 세 가지 요인이 없었다면 히틀러가 민심을 얻기는 어려웠다.
첫째는 고령에도 건재하리라고 믿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오산 또는 변심. 둘째는 프로이센 지방 정부의 붕괴. 셋째는 이 두 가지의 요인을 제공한 기회주의자 프란츠 폰 파펜 총리(당시 63세)의 허망한 꿈. 중급 귀족에 육군 중령 출신인 파펜은 가톨릭 중앙당 출신의 재선의원이었으나 유명 정치인은 아니었다. 의정 활동도 별로 없었다. 다만 힌덴부르크에게는 잘 보였다. 힌덴부르크가 대통령 선거에 나선 1925년부터 소속당이 달라도 열성적으로 지지해 신임을 얻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어떤 정당도 과반을 획득하지 못한 1932년 총선에서 정당 간 연정 구성도 실패하자 파펜 의원을 독일 총리에 앉혔다. 파펜은 내각 구성부터 구설에 올랐다. 각료 11명 중에 귀족 출신이 7명이어서 ‘남작 내각’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나머지 2명은 재벌 회장, 1명은 친구인 장성을 앉혔다. 문제는 파펜의 지지세력이 없었다는 점. 소속당인 가톨릭 중앙당에서조차 당의 동의 없이 총리직을 수락했다는 이유로 출당(黜黨) 조치를 당한 상태였다.
보수 우익 성향의 파펜은 허세를 부렸다. ‘목표는 독재’라고 떠벌렸다. 자신을 비스마르크에 비교하며 헌법을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마침 세계 대공황 아래 극심한 실업난으로 실업 수당 인상을 둘러싸고 노동계와 재계가 대립하던 상황. 무턱대고 사업주가 임금까지 삭감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통에 우익 정당들의 지지마저 잃었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진 그는 원내 제2당인 나치의 히틀러와 손잡았다. 히틀러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2년 임기가 남은 의회를 조기 해산해 총선거를 실시하고 나치 돌격대(SA)에 대한 활동 금지령 해금.
우군이 아쉬웠던 파펜은 덜컥 들어줬다. 자신보다 20년 아래인데다 ‘오스트리아 하사 출신 히틀러’쯤은 요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파펜은 히틀러의 요구 수용은 물론 한 걸음 더 나갔다. 사민당 지지도가 떨어져 내각 구성이 어려워진 프로이센이 목표였다. 7월 17일 나치당과 공산당 간 패싸움에서 사망자 17명이 발생하자 파펜은 ‘프로이센주는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며 개입에 나섰다. 7월 20일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움직여 대통령 긴급명령을 빌어 프로이센주의 각료들을 해임하고 자신이 프로이센 주지사와 경찰청장직까지 겸임했다. 우리로 치자면 대통령이 반대 정당이 집권한 서울시와 경기도 지방 정부를 무너뜨리고 개헌과 영구집권에 나선 형국이다.
연방의 총리가 주의 경찰청장까지 겸임한 행위가 우습게 보이지만 그럴 이유가 있었다. 가장 강력한 주(州)인 프로이센 자유주의 경찰 병력은 약 9만여명. 말이 경찰이지 중화기를 보유해 군대나 다름없었다. 파펜은 프로이센 경찰 지휘부를 잇달아 잡아들였다. 파펜이 전광석화처럼 프로이센을 장악함에 따라 나치 돌격대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군사력인 프로이센의 경찰력이 사실상 나치의 수중에 들어갔다. 파펜이 주도한 ‘프로이센 쿠데타(Preußenschlag)’ 이후 히틀러의 방해물은 사실상 없어졌다. ‘오스트리아 하사 놈에게 체신부 장관 이상의 자리를 내줄 요량이 없다’던 힌덴부르크 대통령마저 협력자로 돌아섰다.
독일인들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그랬다. 의회 해산 후 치러진 총선에서 나치당은 37.3% 지지를 얻으며 원내 1당으로 떠올랐다. 그해 11월 선거에서 지지율은 33.1%로 떨어졌으나 1933년 3월 선거에서는 43.9%로 뛰어올랐다. 대중의 지지를 업은 히틀러는 일당 독재체제를 굳혔다. 다른 정당을 불법화하고 나치당만 합법화한 이후에 치러진 1933년 11월 찬반투표에서는 92.11%가 찬성표를 던졌다. 1936년과 1938년 선거 결과는 각각 찬성 98.8%, 99.01%를 기록했다. 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 독일 국민들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독일인들은 어쩌다 이런 결과를 빚었을까. 백경남 동국대 교수(정치외교학)의 연구 논문 ‘바이마르 공화국의 좌절과 교훈(2002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근대의 여하한 국민도 독일인보다 나은 교양을 갖춘 바 없었다. 독일은 교육 수준과 공업기술의 달성, 과학적 업적의 질과 수준에 있어 50년 동안 전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은 훌륭히 조직되어 있었다. 이러한 국민들이 어찌하여 히틀러 앞에 간단하게 굴복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물음을 제기한 영국 정치학자 라스키(H.J. Laski)는 스스로 해답을 내놓는다. ‘독일은 근대적 기술의 힘을 구사하는 18세기 국가였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법률을 갖고 있었다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프로이센 쿠데타 85주년. ‘덩치만 큰 어린 아이’와 같았던 독일 국민들의 잘못된 선택이 재연될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졌을까. 독일인들의 요즘 성향을 보면 그런 것 같지만 전 세계로 시야를 확대하면 장담하기 어렵지 않을까. 야만에서든 무지에서든 투표 결과가 이성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지지율이 이 것 밖에 안 나올까’라는 의문도 든다. 선거 결과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다. ‘프로이센 쿠데타’ 이후 프로이센의 사민당은 연방정부를 상대로 국사재판소에 제소, 소송전을 펼쳤는데 파펜의 변호를 맡은 인물이 칼 슈미트Carl Schmitt)였다.
법학자이자 변호사였던 그는 독일의 불안정한 의회주의를 비판하며 ‘권력의 활동은 제도가 아니라, 결단이며 친구와 적의 구별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저서 ‘합법성과 정당성’을 통해 합법성 원리를 기반으로 삼는 의회주의보다는 정당성을 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권위의 대통령이 필요하다며 슈미트는 통치자가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한 독재도 문제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악마와 악수한 사상가’라는 평을 듣는 카를 슈미트의 생각은 국내 저명 법률학자들의 손을 거쳐 유신헌법에 그대로 반영됐다.
카를 슈미트의 생각은 지하로 파묻혔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미국 우파 정치학의 대부인 레오 스트라우스와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의 거두라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여전히 살아 있다. ‘악의 화신. 히틀러를 권좌에 앉힌 대중의 미망은 옛 얘기가 아니다.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다. 카를 슈미트의 제자들은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를 가다듬는다. 법과 민주주의도 언제든 당할 수 있다. ’프로이센 쿠데타‘처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