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 생각을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의아하게 여긴다. 사람은 늘 생각하기 마련인데 언제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다. 생각이 현상의 원인을 찾아 대비책을 강구하는 뜻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우리는 보통 학습해서 기억한 내용을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 세상을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 생각하고 살기보다 이전부터 그렇게 해온 관행에 따라 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존 관행이 더 이상 현실에 들어맞지 않으면 처음에 ‘내가 뭘 잘못했을까’ 가볍게 점검하다가도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면 원인을 찾게 된다. 우리는 평소 건강을 생각하지 않다가 몸이 아픈 자각 증세를 느끼게 되면 비로소 건강을 챙기느라 어떻게 할까 생각하게 된다. 사람과의 사이도 늘 되풀이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다가도 뭔가 의심이 들 때 ‘왜 그럴까’라며 생각하게 된다. 즉 생각은 기존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거나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비로소 가동하게 된다.
생각을 잘하려면 개인과 단체가 안정적으로 구축해온 삶의 관행에 균열이 갈 때 그 점을 예민하게 감지해야 한다. 물론 감지하더라도 별일이 아니라며 그냥 지나치면 개인과 단체는 변하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시대에 낙오하게 된다. 감지를 하더라도 기존 관행이 워낙 강해서 변화하기보다 안주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이렇게 되면 상황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나중에 상황에 떠밀려서 변화를 따라가게 된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아무리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기존의 관행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사고의 폐쇄회로에 갇혀 상황 변화를 인정하기보다 부정하거나 심지어 왜곡하게 된다.
한비자 오두편을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중에 변화와 관련해 ‘수주대토(守株待兎)’ 고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송나라 농부가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밭 가운데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농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더운 날 뙤약볕 아래에서 일해 봐도 수익이 얼마 나지 않는데 가만히 있어도 토끼가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으니 그것을 팔아도 재미가 쏠쏠할 듯했다. 계산이 여기에 미치자 송나라 농부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토끼가 그루터기에 부딪히기를 기다렸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보통 수주대토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판하는 문맥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이야기 글자 그대로에 나타나 있는 절반의 진실이다. 한비자는 수주대토의 고사를 기존 관행에 안주해 변화를 거부하는 문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일하지 않아도 토끼가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는 일은 분명 일하지 않아도 놀고먹을 수 있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앞으로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나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다. 만약 농부가 농사보다 토끼사냥에 관심이 있다면 그냥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토끼가 다니는 길목을 지켜 사냥을 하는 방법을 강구하면 된다.
한비자는 수주대토의 고사를 통해 과거에 커다란 영광을 가져다줬던 삶의 제도라도 상황의 변화에 따라 혁신돼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 결국 한비자는 귀족의 명예와 교양을 중시하는 도덕에서 일반 사람의 이익과 공정을 중시하는 결과주의로 사회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자 했다.
사람은 매 순간 변하면 살 수가 없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안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변화도 기존에 거뒀던 성과의 연장선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안정과 성공을 보장해왔던 관행과 가치가 현실과 시대를 이끌어가지 못하고 뒤처질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수주대토의 고사에 나오는 자신의 그루터기를 붙잡고 변화를 거부하느냐 그루터기를 과감하게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느냐를 선택해야 한다. 한비자라면 ‘새로운 그루터기를 찾아(搜株)’ 토끼를 만나는 수주대토(搜株對兎)에 나설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