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세대, 성별, 문화, 종교, 계급의 경계를 넘나드는 물건이 있을까.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의 교수인 저자는 청바지를 “같은 (문화)구조들이 사실상 전 세계적으로 교차하면서도 사회적 경계 간의 차이를 강조한다”고 분석했다. 여배우의 자율성과 매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학생의 순종적인 젊음과 건전함을 동시에 드러내고 편안하게 입은 듯하면서도 잘 차려입은 것처럼 보여주는 청바지는 정반대의 가치를 동시에 담고 있는 재미있는 물건이다. “미국의 아이콘이 돼 전 지구로 전파됐다”는 공통점을 가진 콜라와는 또 다르다.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는 청바지가 미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이 책은 저자가 주도한 ‘글로벌 데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9명의 인류학자가 전 세계의 청바지에 대해 역사학, 패션, 실용성, 문화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엮었다.
청바지가 다른 바지들, 더 나아가 다른 물건들과 달리 인류학적인 의미로 쓰일 수 있었던 이유는 ‘디스트레싱(distressing)’이라는 청바지의 특성 때문이다. 히피 시대, 맨살이 보일 때까지 낡게 입어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서 유래된 이 단어를 빼고는 청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청바지는 다른 천보다 질긴 데님을 원재료로 하는 만큼 세탁하지 않아도 몇 번은 그냥 입을 수 있고 10년 넘게 입어도 헤지지 않는다. 공장에서 막 만들어져 빳빳했던 청바지는 이렇게 오랫동안 입으며 입는 사람의 몸에 맞춰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진다. 같은 듯하면서도 같지 않은 나만의 바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청바지에 담겨있는 개인의 흔적은 청바지에 ‘내밀성’을 부여한다. 마치 ‘제2의 피부’가 돼 청바지를 보며 개개인의 숨겨진 삶의 궤적, 더 나아가 성적인 매력까지 연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내밀성’ 때문에 청바지가 일탈 욕망의 표현 창구가 될 수 있었다고 평했다. 브라질 여성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 펑크 볼 파티에 갈 때 자주 입는다는 몸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인 ‘브라질리언 진’이 대표적이다. 청바지를 통해 드러내고 싶은 부위는 더 도드라지게 드러내면서도 뱃살처럼 감추고 싶은 곳은 숨겨 성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한편 이런 내밀성은 영국의 ‘보이프렌드 진’의 유행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다. 옷 자체가 섬유의 얽힘이듯, 남자친구의 청바지를 입음으로써 서로 간의 유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천천히 해진다는 청바지의 특징은 한 청바지를 사용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는 ‘청바지 계보학’이란 개념도 만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은 일주일에 평균 3.2일 꼴로 청바지를 입는다고 한다. 가장 비정치적이면서도 가장 정치적인 옷, 가장 글로벌하지만 가장 개인적인 옷, 가장 비개성적이지만 가장 개성적인 옷인 청바지를 통해 우리의 현재 모습을 알아보자. 저자는 “청바지 가격이 30달러부터 230달러까지 다양하지만 재질과 스타일에서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는 없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청바지를 누가, 어떻게, 왜 입느냐는 것이다. 2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