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허 회장님 제가 지난번에 봤을 때 걷기가 취미라고…”
28일 오후 청와대 본관 로비에서 재계와 대화하기 위해 기업인 간담회를 연 문재인 대통령이 초대받은 허창수 GS 회장에게 던진 말이다. 최고 권력자 앞에서 긴장했을 허 회장은 문 대통령의 한마디에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걷기 운동 이야기를 풀어가며 첫 대면의 어색함을 금세 잊은 듯했다. 전날에 이어 이날에도 문 대통령은 참석자들의 최근 관심사항을 꼼꼼히 파악해 이야기를 걸어 분위기 전환을 이루는가 하면 진지한 경청의 자세로 환담장을 훈훈하게 했다. 특히 조선산업 침체로 고충을 겪고 있는 최길선 현대중공업 회장에게는 “조선경기가 워낙 오랫동안 안 좋아서 고생이 많으셨다”며 “조선산업 힘내라고 박수를 한번 치자”고 기운을 불어넣어 줘 눈길을 끌기도 했다.
문 대통령이 주요 기업 총수와 나눈 대화가 화제다. 야당 정치인 이미지가 강해 재계와의 접점이 없어 보이는 문 대통령이 재계와 맺은 인연과 소통 방식에 대해 분석해봤다.
①‘지피지기’, 당 대표 시절부터 재계 공부=‘대선 재수’를 한 문 대통령은 당 대표 시절부터 대기업 공부를 시작했다. 민주정책연구원이 주도한 4대 기업 연구소장 세미나에 매주 참석해 국내 경제와 주요 산업의 현실에 대해 공부해왔다. 또 야당 대표 시절 이례적으로 대한상공회의소를 찾기도 하는 등 ‘반기업’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대선 기간에는 ‘10년의 힘 위원회’라는 외곽 조직을 만들어 경제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박봉흠 전 예산처 장관 등 대기업 사외이사 출신이 대거 포함돼 진보 진영의 비판이 뒤따랐지만 결국 문 대통령의 자산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페이퍼 보고서를 좋아하는 문 대통령은 호프 미팅에 참석한 기업 총수들의 특징과 사적인 이야기까지 다 보고받고 숙지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손주를 본 것을 축하해주고 구본준 LG 부회장의 별명이 ‘피자 CEO’인 것을 칭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②‘껌뻑껌뻑’하며 경청…‘피드백’은 신중=문 대통령은 평소 과묵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이 당 대표와 대선 후보 시절 영입한 인사 중 대다수는 “별다른 말보다 눈을 껌뻑껌뻑하면서 말을 경청해준 것이 감동이 됐다”고 설명한다. 문 대통령은 호프 미팅에서도 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기업의 애로사항을 듣고, 기업인들의 생각을 물어본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이 경청을 잘한다고 해서 항상 확실한 피드백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규제 완화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구하는 재계의 목소리에 긍정적인 답변을 했지만 구체적인 입법계획이나 지원 방안, 시기 등에 대해서는 못 박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규제프리존법이나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 재계가 요구한 법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③패션과 먹거리는 중소기업, 전통시장 애용=수권정당, 준비된 대통령의 이미지를 위해 대기업과의 접점을 늘려온 문 대통령은 소상공인·중소기업과 더욱 친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즐겨 신었던 ‘AGIO’라는 브랜드의 구두는 청각장애인들이 만들었고 독도 기념의 날 행사로 제작된 중저가의 넥타이를 매 화제에 올랐다. 문 대통령이 호프 회동의 맥주로 중소기업 맥주인 ‘세븐브로이’를 선택한 것도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제품을 애용하는 문 대통령의 삶의 방식과 연관성이 깊다.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김정숙 여사에게 백화점을 이용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등 청와대 입주 전까지 전통시장을 자주 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④정책과 유머를 섞은 ‘정책 개그’ 구사=문 대통령은 특전사 출신이다. 무뚝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재계 총수와 딱딱한 경제정책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정책과 개그를 절묘하게 결합한 이른바 ‘정책 개그’를 구사해 차가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7일 기업인들과의 만찬에서 “부동산 가격을 잡아주면 제가 피자 한 판씩 쏘겠다”고 말했다. 구본준 부회장이 직원들에게 피자를 돌려 ‘피자 CEO’라는 별명이 붙은 것을 거론하면서 최근 가열되고 있는 부동산시장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재계 총수들이 만면에 미소를 띤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까. “허심탄회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문 대통령과 기업인들의 첫 만남에 참석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남긴 ‘후기’다. 정 부회장은 27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문 대통령과 기업인들이 상춘재에서 맥주잔을 들어 보이는 사진과 함께 이날 대화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박형윤·박윤선기자 mani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