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 건물 앞에 선 제법 큰 규모의 조각 작품들은 강한 인상을 주지만 작품이 반드시 그 건물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을 위한 기업소유 건물 등을 제외하고는 건축주와 건물주가 동일하지 않을 경우도 그곳에서 업무를 보는 업체가 동일하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건물 앞에서 발견하는 조각 작품 대부분은 ‘미술장식품’으로서 건축비의 일정 액수를 미술작품 설치나 문화예술진흥기금에 출연하는 법률적 규제에 따른 결과다. 그런데 예술작품과 달리 건물 앞에 동상이 서 있을 때는 ‘간판 대신 동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를테면 김대건 동상이 선 곳은 천주교 교회, 홍영식 동상이 선 곳은 우체국임을 감각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허사무실을 찾아 방문한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도 동상이 있었다. 오른손에는 자를 들고 있고 왼손은 측우기에 대고 있으니 장영실(蔣英實·1390년께~생몰년 미상)이다. 세종대왕께서 “자격궁루(自擊宮漏·자격루로도 불리는 물시계)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했다지만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칭찬한 바로 그 인물이다. 세종실록에 따르자면 물시계 아이디어는 세종대왕의 것이었고 제작은 장영실이 맡았다.
그렇다면 장영실의 왼손이 쓰다듬고 있는 측우기는. 기상청은 지난 2010년 열린 세미나를 통해 측우기를 만든 사람이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의 아들 문종이었음을 공식화했다. 즉 장영실 동상은 자신의 발명품이 아닌 측우기와 함께 대좌 위에 올라 있는 셈이다. 꽤 오랫동안 한국과학기술원(KIST) 본관 옆에 설치돼 있다가 다른 동상에 자리를 내준 장영실 동상이나 장영실국제과학문화상 수상자가 기증한 초등학교의 동상에 이르기까지 장영실 동상은 그의 발명품이 아닌 측우기와 함께였다. 돌이켜보면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했다고 교육받았으니 동상의 발주자나 조각가 누구의 잘못은 아니다. 또 측우기를 그가 발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장영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학기술연구사에서 그간의 정설을 뒤집고 아이디어를 제공한 문종을 창작자로 인정한 것이 획기적인 일이다.
특허사무실에서 만났던 변리사는 때로 자신의 업무에 회의를 느낀다고 했다. 아이디어나 콘텐츠에 대한 가격책정이 너무 낮을뿐더러 저작권에 대한 인식마저 희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100년 동안 들을 수 있는 음원은 500원에 불과한데 휴대폰 연결음은 2,000원인 상황을 예로 들었다. 최초 창작자의 권리보다 이를 가공한 기술에 가격을 더 책정하는 것,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물질을 생산하는 산업시스템에 속한다는 증거이다. 아이디어나 원천 소스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한 사람의 가격을 물건보다 낮게 책정하는 한 우리의 4차 혁명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조은정 한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