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깨어있는 시민…젠거 재판






1735년 8월 4일 뉴욕주 법원. ‘뉴욕 위클리 저널’ 편집인 존 피터 젠거(John Peter Zenger·37세)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법정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젠거가 어떤 벌을 받을지 시민들의 관심이 컸다. 젠거에게 적용된 죄목은 폭동 선동 및 명예훼손. 윌리엄 코스비 뉴욕 식민지 총독(45세)의 전횡과 학정을 폭로하다 명예훼손죄로 체포돼 감옥에서 9개월간 복역한 젠거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권력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총독의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 신문사에 불까지 질렀다. 총독의 위세에 눌려 변호사마저 구하기 어려웠다. 재판장은 노골적으로 총독 편을 들었다. 방청객들은 안타깝지만 유죄 선고를 받을 것이라고 점쳤다.

인쇄업자 출신 젠거가 법정에 서게 된 배경은 정파 간 갈등. 왕당파와 식민지의 권리를 중시하는 지방파가 1731년 부임한 코스비 총독의 전횡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아일랜드에서 주로 복무했던 군인 출신 코스비는 공금을 제멋대로 쓰고 상대 정파를 인정하지 않아 신망을 잃었다. 모국인 영국에서는 명예혁명 이후 의회가 국사를 결정했으나 코스비는 국왕이 상실한 권리를 식민지에서 행사하려 들었다. 급여를 둘러싸고 식민지 정치인들과 갈등이 빚어지자 코스비 총독은 소송을 제기하고 자기편을 재판장에 앉혔다. 언론도 한 편으로 만들기 위해 ‘뉴욕 가제트’ 지의 편집인에 심복을 심었다.

식민지 정치인들은 새로운 언론을 설립해 총독의 전횡에 맞섰다. 야당을 대변하는 주간지 ‘뉴욕 위클리 저널’을 창간하고 독일계 인쇄업자인 젠거를 발행인으로 삼았다. 뉴욕 위클리 저널은 신랄하게 기사를 써댔다. 총독 주변 인사들의 부정과 코스비가 식민지 의회 선거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코스비 총독이 모피를 얻으려 남몰래 인디언·프랑스인과 교류하고 마음대로 세금을 유용해 ‘악취가 난다’고 꼬집었다. 분노한 코스비 총독은 ‘주민들을 선동하는’ 뉴욕 위클리 저널을 폐간시켜 달라는 소송을 걸었다. 소송전에서 폐간이 무산되자 발행인과 편집인을 겸임하던 젠거를 선동죄 혐의로 체포해 법적 근거도 없이 9개월 동안 감옥에 가뒀다.

코스비 총독은 재판에서 젠거와 신문사, 정치인들을 응징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결과는 딴판. 무죄로 나왔다. 방청객들은 환호를 질렀다. 재판장이 변호사의 증인 신청을 일절 받아들이지 않는 편파적 진행에도 젠거가 예상을 뒤엎고 승소한 이유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 변론 덕분. 북미 식민지에서 가장 명망 높은 변호사인 앤드루 해밀턴의 변론에 배심원단의 마음이 움직였다. 80세 고령이지만 필라델피아에서 달려와 무료 변론을 자처한 해밀턴은 최후 변론에서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권력은 거대한 강물과 같습니다. 잘 통제되면 아름답고 유용합니다. 그러나 강물이 둑을 넘어 아무 곳으로나 거세게 흐른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물길을 잡을 수 없다면, 모든 것이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의 부당함을 불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재판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뉴욕의 문제도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고 쓰는 자유에 관한 문제입니다. 비판은 모든 자유민의 권리입니다. 우리는 권력이 자유를 위해 유용하게 행사되도록 최선을 다해 감시하고 꾸짖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무법적(無法的)인 권력을 막는 보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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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단 12명은 10분 동안 회의를 갖고 젠거에게 무죄를 평결했다. 해밀턴의 변론대로 젠거 재판의 결과는 젠거 개인과 뉴욕주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공직자가 제기하는 명예훼손 재판에서 배심원들의 무죄 평결이 늘어났다. 영국의 통상 및 조세법과 관련된 판결에서도 배심원들은 법 조항보다 식민지 사회의 현실을 더 반영해 식민지 당국을 애먹였다. 영국에서 파견된 식민지 관리와 징세관들은 ‘지역 배심원들의 자의적인 무죄 판결로 인해 더 이상 세금 징수가 불가능하다’고 한탄했다. 식민 지배 체제가 밑에서부터 흔들린 것이다.

언론의 행태도 바뀌었다. 당시 13개 북미식민지의 인구는 약 74만 명 수준. 언론이 막 피어나던 시기였다. 1704년 첫 신문이 나온 이래 22개 신문사가 설립돼 경쟁을 펼쳤으나 대부분 정부의 소식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친정부 매체였다. 젠거가 무죄로 풀려나자 자유로운 비판과 권리 의식이 퍼지며 언론과 출판의 논조도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비판과 권리의식이 자라 북미 식민지 언론은 차 조례·인지세법 등이 나올 때마다 본국 정부의 경제 착취를 보도, 불만을 고조시켰다.

젠거 재판에 영향받은 언론 자유의 신장이 미국 독립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1775~83)을 펼쳐 국가를 세운 미국인들은 연방 수정헌법 1조에 ‘권리장전’을 집어넣었다. 종교와 언론·출판, 집회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다. 언론에서도 젠거 재판은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억된다.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보다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이며 ‘비록 명예 훼손을 저질렀어도 사실에 근거한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미국에서 자리 잡았다. 젠거 재판 250년이 지난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8월 4일을 ‘언론자유의 날’로 선포했다. 젠거 재판이 미국사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돌렸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보장한 미국의 수정헌법 1조와 비슷한 법을 우리도 갖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2조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건만 언론은 과연 자유로운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국제언론감시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올해 언론 자유지수 순위는 세계 63위. 노무현 대통령 시절 2006년 세계 31위를 기록한 뒤 추락 일변도다. 지난 2016년에는 역대 최하위인 70위까지 떨어졌었다. 대통령과 관련된 사소한 보도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으니 언론자유지수가 10년 동안 무려 40계단이나 추락한 게 당연하다.

젠거 재판을 살피며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불의에 저항하는 언론인,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변호사와 배심원단…. 우리는 282년 전 그들과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를까.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약자를 돕기는커녕 특권이라도 가진 것처럼 행세하는 기자가 하나 둘이 아니다. 오죽하면 ‘기레기’라는 말이 나왔을까. 이익집단화한 언론사도 적지 않다. 부끄러운 세월 속에 쌓이고 쌓인 언론 적폐가 이제는 조금이라도 사라지면 좋으련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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