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역사적 자각·자긍심·사랑…길원옥 여사가 내게 준 선물”

길원옥 할머니 子 황선희 목사

풍부한 사랑 받고 자신도 아이 입양

수요집회·시사회 가족과 함께 참석

"역사적 아픔 함께 연대하고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90)할머니의 아들 황선희(59) 목사가 14일 인천 연수구 생수감리교회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유년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사진 속에는 길 할머니(왼쪽)와 황 목사(오른쪽)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다./인천=송은석기자‘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90)할머니의 아들 황선희(59) 목사가 14일 인천 연수구 생수감리교회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유년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사진 속에는 길 할머니(왼쪽)와 황 목사(오른쪽)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다./인천=송은석기자


“어머니, 일어나세요. 청계광장에 노래하러 가셔야죠.”

14일 아침 7시, 아들의 다정한 목소리에 어머니가 눈을 뜬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90) 할머니와 아들 황선희(59) 목사의 아침 통화다. 이날은 길 할머니가 ‘세계위안부기림일’을 맞아 첫 음반을 내는 날이다. 황 목사는 “비가 올 테니 우산을 꼭 챙기셔야 한다”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길 할머니의 분신이자 ‘매니저’를 자처하는 황 목사는 갓난아기 때부터 길 할머니가 거두어 키운 입양 아들이다. 위안부 생활 후 인천항에 정착해 살던 길 할머니가 계란·번데기·젓갈 장사를 하며 정성껏 돌본 끝에 어엿한 교회 목사가 됐다. 전후 가난한 시절에도 소고기김밥을 먹을 만큼 끔찍이 사랑받았다는 황 목사는 길 할머니를 “내 인생을 낳아준 분이자 나를 있게 해 준 토양”이라고 부른다. 황 목사는 자신도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갚고 싶다며 지난 2000년 5세 아이를 입양했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받은 무녀독남 아들도 자신의 어머니가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마흔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목사 아들 인생에 누가 될까 함부로 말도 못했다”며 평생 과거를 감춰 온 길 할머니는 1998년 겨울 무렵, 위안부 보상 문제를 보도하는 뉴스를 보다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정작 돈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진짜 쉬쉬하고 부끄러워하고 고개도 못 드는데, 저렇게 엉뚱한 사람들이 저러냐.” 눈치 빠른 며느리가 재우쳐 묻자 길 할머니는 한참을 망설이다 50년 만의 위안부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날 밤 새벽 1시, 아들 부부와 길 할머니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살아난 게 기적이다”며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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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인천 연수구 생수감리교회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황선희(59) 목사가 어머니와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다./인천=송은석기자14일 인천 연수구 생수감리교회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황선희(59) 목사가 어머니와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다./인천=송은석기자


어머니가 꼭꼭 감춰 온 비밀을 뒤늦게 알게 된 그는 그 때부터 길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참상을 알리는 데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황 목사는 무대에서 ‘정든 님을 보내며’를 부르는 할머니를 카메라에 담고, 황 목사의 딸은 지난해 캐나다에서 열린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 ‘어폴로지’ 개봉 시사회에 휴가를 내고 참석했다. 황 목사 가족이 길 할머니와 곳곳에서 찍은 ‘셀카’들은 할머니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사랑의 증표다.

위안부 문제가 막 공론화되기 시작할 무렵엔 “위안부 생활이 자랑스러운 일도 아닌데 저렇게 TV에 나오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황 목사는 “위안부 동원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적 아픔이지 어머니 개인이 당한 수치가 아니다”며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피해자가 얼마나 수치스러워야 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왜 그런 가해를 했느냐’는 질문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길 할머니와의 사진을 손에 꼭 쥔 황 목사는 “구순이 넘은 어머니는 이제 귀가 잘 들리시지 않는다”며 “제게 인생을 선물해 줬고, 지난 역사를 자각하게 해 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가슴 속 응어리를 풀기를 매일 바라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신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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