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대비를 위해 자산운용사를 찾은 50대에게 “지금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하시죠”라고 권유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자산운용사 직원에게 욕을 할 것이다. 안정이 최우선인 노후를 주식에 맡기라니 말이다.
일본 도쿄 한조몬역에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사와카미투자신탁을 찾은 중년 고객은 주식 투자를 권유받는다. 30년 넘게 저축만 고집하며 노후를 준비하던 고객에게 과감하게 위험 투자를 권유하는 자산운용사 대표가 ‘일본의 워런 버핏’으로 불리는 사와카미 아쓰토(사진) 사와카미투자신탁 회장이다. 사와카미 회장은 투자는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줘 결실을 거두는 농사라고 말한다. 농사꾼이 어떤 작물을 수확할지 알고 씨앗을 뿌리듯 투자도 명확한 타기팅(targeting)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노후 대비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사와카미 회장이 강조하는 한 가지가 농사를 대신 지어주는 소작농과 같은 운용사들의 신뢰다.
지난 2일 사와카미홀딩스에서 만난 사와카미 회장은 일본 금융투자 업계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일본 금융투자 업계가 자국민의 노후 대비에 기여한 정도를 점수로 매겨달라고 묻자 그는 “지금 일본 금융투자 시장은 0점이다. 업계 수익을 위해 단기 투자를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투자사에 대한 신뢰도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한국금융투자자보호재단에 따르면 금융상품을 판매할 때 투자자 보호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는 응답한 비율은 10명 중 1명에 불과하다. 특히 펀드 투자 경험이 없는 경우는 6%에 그칠 만큼 불신이 극에 달한다. 국내 펀드 투자 비율은 2012년 50%에서 지난해 32.3%로 크게 줄었다.
사와카미 회장은 금융투자 업계의 불신에서 출발했다. ‘잃어버린 20년’인 저성장·저금리 시대에 예·적금밖에 모르는 일본 샐러리맨들을 위한 펀드를 만들어 평범한 사람들의 자산을 불려주는 믿을 수 있는 펀드를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지난 1996년 투자자문사로 독립했다. 애널리스트·펀드매니저를 거쳐 1986년부터 유럽 스위스픽테트은행 일본 대표로 17년간 근무했던 사와카미 회장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사와카미투자신탁은 1999년 8월 출시한 ‘사와카미펀드’ 하나만을 19년째 운용하고 있다. 펀드의 설정액은 3,000억엔(약 3조562억원)을 넘겼다. 연평균 수익률은 약 4.95%에 달한다. 가입자는 대부분 회사원으로 노후 준비로 매달 월급의 일부를 투자한다.
사와카미펀드는 출범 초기 독특한 판매 시스템으로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일본 역시 은행·증권사 등 판매사에서 펀드에 가입하던 관행을 깨고 사와카미펀드는 온라인 ‘직판(직접판매)’을 고집했다. 실패할 것이라는 전망을 깨고 사와카미펀드는 독립계 운용사로 직판으로만 3,000억엔을 모았다. 마케팅 수단은 사와카미 회장이 직접하는 연 200회가량의 세미나와 입소문이 전부다. 사와카미 회장은 “마케팅은 단기 투자 고객을 겨냥한 수단이라 장기 투자를 지향하는 우리 펀드와는 맞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판매사의 마케팅에 현혹돼 가입한 투자자는 낮은 수익률만으로도 금세 환매하기 때문에 펀드의 장기 운용에 오히려 해가 된다는 설명이다. 사와카미 회장은 “3%의 판매수수료만 노리고 새로운 펀드를 계속 만들면서 기존의 펀드는 방치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며 “일부 대형 운용사는 펀드 수가 500~600개로 제대로 된 운용이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펀드 수 증가는 수익률 하락과 운용사를 향한 투자자들의 불신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46개의 대형 펀드 중 현재 기준가가 1만엔을 넘어가는 펀드는 9개에 불과하다”며 “심지어 20여개의 기준가는 6,000엔(-4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사와카미 회장은 “이 때문에 투자자들이 ‘금융투자회사는 사기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며 “여러 펀드를 운용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사와카미 2호 펀드를 설정할 계획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사와카미 회장의 운용 철학은 국내 펀드 시장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우리나라도 금융 계열 은행·증권사의 펀드 판매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IBK자산운용은 전체 설정액의 83.72%(6월30일 기준),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과 KB자산운용은 각각 66.07%와 60.46%가 계열 은행에서 유입됐다. 전문가들은 계열 운용사·판매사끼리 서로 밀어주는 시스템 속에서는 좋은 펀드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단기 투자를 부추기는 것도 문제다. 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전체 목표전환형 펀드 62개(10일 기준) 중 38개가 올해 설정되는 등 국내 자산운용 업계는 회전율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목표전환형 펀드는 가입 주기가 짧아 판매사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대표적 상품으로 꼽힌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은 “단기 수수료에만 집착해 결국 투자자의 신뢰를 잃은 일본 펀드 시장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사와카미펀드 같은 장기 상품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김연하기자 yeon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