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완곡어법, 에둘러 말하기의 비밀과 폭력

남을 배려하는 순기능 있지만

성노예 순화시킨 '위안부'처럼

본래 의미마저 축소·왜곡시켜

가해자 숨기는 '정교한' 가면

정여울 작가




왜 사람들은 ‘해고’라는 표현 대신 ‘다운사이징’이라는 단어를 쓰고, ‘성노예’라는 단어 대신 ‘위안부’라는 단어를 쓸까. 이런 완곡어법은 사태의 진정한 본질을 왜곡시키고 폭력의 직접성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완곡어법은 원래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민망한 단어들을 듣기 좋게 포장하기 위해 쓰이곤 하지만, 때로는 그 ‘언어의 가면’이 너무도 신출귀몰하여 본래의 의미마저 퇴색되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는 완곡어법은 ‘노동시장 유연화’와 ‘학사관리 엄정화’였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비정규직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고 전례 없는 대량 해고를 예비하는 암울한 미래의 신호탄이었다. ‘학사관리 엄정화’는 학생들에게 ‘데모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서 너 자신만 생각하는 효율적인 인간이 되라’는 학교 측의 의도를 은폐하는 완곡어법이었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승자는 대기업의 소유주들이었으며, 학사관리 엄정화 이후 대학은 오직 성공과 돈만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판을 치며 자유와 낭만 따위는 사라진 삼엄한 취업예비학교가 되어가고 있다.

2615A37 언어정담



물론 완곡어법의 순기능도 있다. 거칠고 퉁명스럽거나 민망한 단어들을 좀 더 온화하고 부드럽고 세련되게 바꾸어주는 것이다. ‘변소’를 ‘화장실’이라고 말하고, ‘죽었다’를 ‘돌아가셨다’고 표현하고, ‘엉덩이’를 ‘둔부’라고 표현하는 정도는 듣는 사람을 배려하는 완곡어법이다. 초밥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초밥의 엄청난 팬은 아니에요(I’m not a big fan of sushi.)’라고 말하는 것은, 실은 ‘나는 초밥을 싫어한다’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예의바른 완곡어법이다. 완곡어법(euphemism)은 본래 ‘좋다’는 뜻의 ‘eu’와 ‘말한다’는 뜻의 ‘pheme’이 합쳐진 말로서, 불길한 말을 대신하여 쓰는 호의적인 말이었다. 최초의 탄생 의도는 좋은 것이었으나, 현대사회의 질곡과 함께 점점 행동반경을 넓힌 완곡어법은 이제 권력자의 의도를 눙치거나 은폐하기 위한 무기로까지 진화하고 말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부수적인 피해(collateral)’다. 원래 군사용어였던 이 단어는 무기로 적을 타격한 뒤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를 가리키는데, 사실 그 본래 의미 자체가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어떻게 민간인 피해가 ‘부수적(collateral)’이란 말인가. 군사목표를 타격하는 것은 중요하고,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생명은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위안부 문제를 ‘전쟁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머릿속에도 바로 그 심각한 문제를 ‘부수적인 피해’로 격하시키는 사고방식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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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완곡어법은 배려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말의 본래 의미를 희석시키고 애매하게 만드는 말, 마침내 책임소재마저 불분명해지는 완곡어법은 결국 책임자가 뒤로 빠지는 말, 뭔가 탈이 일어났을 때 아무도 책임지지 않기 위한 사전포석이다. ‘구조조정’이라는 악명높은 완곡어법도 수많은 노동자를 잔인하게 해고하는 기업의 진짜 얼굴을 숨기기 위한 꼼수였다. 거짓말을 사탕발림으로 교묘하게 포장하는 완곡어법, 시커먼 속내를 감추기 위해 말만 번드르르하게 위장하는 완곡어법은 ‘보다 진실하게 내 마음을 표현하는’ 언어의 본래적인 기능을 박탈하고 만다.

모든 완곡어법이 사악하진 않지만 이 에둘러 말하기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사태가 지닌 원초적 갈등과 직접적인 자극을 피하는 것이다. 과연 위안부라는 완곡어법이 이 지울 수 없는 역사적 트라우마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을까. 유엔인권위의 지적처럼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간접적 표현이 아닌 강요된 성노예(enforced sex slaves)라는 직접적 표현을 통해 다시는 그런 끔찍한 만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종을 울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집단학살(genocide)을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라고 표현하고, 낙태(abortion)를 임신중절(pregnancy termination)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태의 심각성이 완화될까. 감옥(prison)을 교정시설(correctional facility)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누군가가 갇혀 있다는 사실이 사라질까. 우리는 폭력을 은폐하는 완곡어법, 사태의 정확한 묘사로부터 도피하는 완곡어법에 저항해야 한다. 완곡어법은 가해자의 진짜 얼굴을 가리기 위한 정교한 언어적 가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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