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를 자르고 양복과 중절모로 한껏 멋을 낸 모던 보이와 반짝이는 구두와 양장을 두른 모던 걸들이 도시 풍경을 바꿨던 1930년대 경성. 이 시대의 풍경과 문학은 물론 이른바 옛 서울 사투리인 ‘경알이’를 연극 무대에서 재현하려는 이가 있다. 제12언어스튜디오를 이끌며 ‘말의 맛’에 천착해온 극작가 겸 연출가 성기웅(사진)은 약 10년에 걸쳐 ‘소설가 구보씨의 1일’ ‘깃븐우리절믄날’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을 통해 구보 박태원, 시인 이상, 소설가 김유정, 화가 구본웅 등 1930년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의 말, 글, 삶을 무대 위로 소환했다.
다음 달 5일 두산아트센터에서 선보이는 ‘20세기 건담기(建談記)’는 이 시리즈의 화룡점정이라 할만하다. 갖가지 언어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과 배우들이 직접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어우러지며 시각보다는 청각을 자극하는 공연으로, 관객들의 상상의 공간을 넓힐 예정이다. 27일 개막 전 연습이 한창인 두산아트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이번 작품은 전작들보다도 ‘말의 맛’에 집중하는 공연으로 보인다. 특별한 무대 전환 없이 20대 예술가들이 서울 사투리는 물론 일본어, 영어, 에스페란토 등 다양한 언어로 말의 향연을 펼치는 형식이다. 특히 박태원과 이상이 마이크 앞에 서서 4차원 라디오 기술을 통해 21세기 청중들에게 ‘건담’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하며 마치 라디오쇼처럼 진행된다. 이런 형식의 작품을 구상한 이유는 뭔가.
△무대는 1930년대고 지금의 관객들은 2017년을 살고 있으니 그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건담기(建談記)는 구보 박태원과 시인 이상이 자신들을 건담가(健談家, 말로 많이 떠들어대는 사람)라고 자처하며 재미난 입담으로 주변 문학인들을 웃기고 다녔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라디오쇼 형식을 취하면 디테일한 언어나 당시의 풍속에 집중하기 좋을 거라 생각했다.
-1930년대를 다룬 성기웅의 작품 모두 당시 말을 채집하고 재현하는 데 큰 의미를 둔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 말을 무대 언어로 세우는 이유가 뭔가.
△서울말은 들으면 정감 있고 재미있는데 연극에서 표현하는 서울말은 이른바 목욕탕 발성을 중시하고 주로 번역극을 다룬 탓인지 재미없고 딱딱하고, 규범화되 말을 쓰는 경우가 많다. 묘하게 왜곡된 ‘연극 조’를 탈피해 표준어 이전의 말을 찾고 싶었다. 이번 무대 언어인 1930년대의 서울말은 자연스럽고 정감 어리다. 그 당시를 살았던 인물들의 실제 말버릇이나 특유의 어휘를 듣는 재미도 있다. 1930년대는 맞춤법이 생겨나기 전, 정형화되지 않은 말투의 생생한 언어 세계가 있었다. 특히 구보 박태원의 글에는 염상섭 못지않게 당시의 서울말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지금 나오는 소설집은 지금의 말투로 고쳐놔서 찾아보기 힘든데 과거 출판본을 찾아보면 대화에 당시의 표기와 말투가 살아있다. 언어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1930년대는 경성 시가지 계획으로 오늘날의 서울이라는 공간성이 생겨난 시기다. 생각보다 가까운 시대라는 점, 당시 사람들의 도시적 삶과 사고방식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이번 작품에서도 철저한 자료조사와 고증이 돋보인다. 극본의 각주를 보면 이들이 실제 편지 등의 글에 썼던 말들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많다. 이런 자료 조사를 어떻게 하나.
△희곡집을 내기 위한 사전작업이기도 하다. 어떤 부분이 사실이고 허구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10년간 자료조사를 했으니 이제는 제법 자료가 쌓였다.
-성기웅의 연극은 관객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는 낯선 연극으로 유명하다.
△요즘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TV가 바보상자라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설명이 지나치고 각종 CG와 자막, 효과음을 동원해 시청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요즘의 연극 역시 관객들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감정을 설명해주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기왕 극장까지 온 관객이라면 자기 멋대로 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길 바란다 관객들에게 주입하고 감정을 몰아가기 보다는 혼자 생각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기고 일상에서 잠들어 있던 감각을 깨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양한 화학작용이 일어나도록 상을 차리는 것뿐이다.
-앞으로 계획은
△국립극단과 함께 ‘가지’를 선보였던 재미교포 작가 줄리아 조의 ‘랭기지 아카이브’를 오는 11월 예술공간 서울에서 선보일 계획이다. 지난해 대산문화재단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체류하다가 줄리아 조의 작품을 봤다.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작가지만 꼭 한번 그의 작품을 연출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 초에는 ‘가모메’로 일본 투어를 돈다.
사진제공=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