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석상에서 삼성전자 얘기만 나오면 머리를 숙이던 일본과 대만 정부 관계자들이 지난해 갤럭시 노트7 배터리 발화 사건 당시 얼마나 조소를 하던지 그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삼성은 오랜 질투의 대상인 동시에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따라잡아야 하는 숙적입니다.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삼성의 앞날을 비관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싱가포르 주재 정부부처 관계자)
삼성 후계 경영인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5일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 받은 가운데 글로벌 영업과 인사 및 그룹 사업재편 등 핵심적인 3대 분야에서 삼성에 ‘총수 부재 리스크’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계열사별 전문 경영인 체제가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지만 주요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과 적절한 인사, 대규모 투자 및 인수합병(M&A) 등을 비롯한 사업재편은 총수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소유 경영과 전문 경영의 조화 속에 굴러가던 회사에서 경영의 한 축이 무너진 것이다.
①글로벌 이해관계 첨예한 삼성…총수 네트워크 실종=삼성은 세트(TV·휴대폰·가전 등)와 부품(반도체·디스플레이)을 모두 생산하면서도 글로벌 일류 반열에 오른 독특한 기업으로 대외적으로 이해관계가 상당히 복잡하다. 글로벌 공룡 애플과의 관계만 해도 아이폰의 최대 경쟁자(갤럭시)인 동시에 아이폰의 핵심 부품(OLED·유기발광다이오드)을 납품하는 부품사이기도 하다. 또 자동차 전장업체 ‘하만’과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하는 기업(삼성 SDI)으로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 사이에서 총수 차원의 적극적 세일즈가 필요하고 구글·아마존 등 시장을 선도하는 플랫폼 회사들과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 부회장이 삼성의 총수이자 등기이사로서 삼성과 얽힌 글로벌 시장의 다양한 갈등과 이해관계를 직접 풀어야 할 주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부재가 삼성에 미칠 파장은 이루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 부회장은 구속 이후 피아트크라이슬러그룹(FCA)의 지주사인 이탈리아 ‘엑소르(Exor)’ 사외이사에서 물러났고 주요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한데 모이는 선밸리 컨퍼런스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은 총수가 일일이 경영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해외 파트너들과의 중요한 협상을 갈무리 짓는 역할은 직접 나서서 해왔고 이를 통해 상당한 성과를 올려왔다”며 “그 역할을 전문경영인이 해주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 부회장 부재로 인한 중장기 손실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②CEO 인사 적체 심각…조직 문화 느슨해질 것=삼성 내부적으로는 이 부회장이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음에 따라 ‘인사 적체’ 문제가 가장 큰 리스크로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기존에 전무 이상 고위임원에 대해서는 미래전략실이 인사 평가와 인사를 진두지휘해왔는데 미전실 해체 이후 별도의 고위임원 인사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 부회장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고 미전실의 주요 경영진이 모두 물러난 상황에서 미전실 이후의 체제를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CEO 인사는 지난해 말부터 계속 미뤄졌고 CEO 인사가 나지 않다 보니 임원 인사 역시 매우 제한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일부 CEO들은 실적 악화에도 불구, 4~5년씩 재임 기간을 채우고 있다. 실적에 따른 ‘신상필벌’이 가장 분명했던 삼성이라는 조직이 느슨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인사 적체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경우 삼성 특유의 ‘스피드’와 ‘실행력’을 잃고 도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삼성 안팎에서 나온다.
③대규모 투자·M&A 엄두 못내…멈춰선 사업 재편=이 부회장이 추구했던 경영은 ‘실용주의’로 요약된다. 화학·방산 등 비주력 계열사들을 매각한 것은 그가 이건희 회장 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던 당시부터 구상해오던 그림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시장에서 1등인 삼성전자 같은 기업을 지키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선단식으로 다수의 계열사들을 끌고 가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 부회장은 ‘전자·바이오·금융’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하고 전장사업 등 신성장동력을 새롭게 발굴해 이 회장 이후의 삼성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장기간 옥에 갇힐 경우 이 부회장의 ‘뉴 삼성’은 길을 잃게 될 수밖에 없다. 이 부회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사업 재편을 추진할 주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룹 내 동력도 부족하다. 삼성 관계자는 “5년 후, 10년 후 지금 사업재편을 하지 못한 혹독한 대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