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착한 에너지, 나쁜 에너지 따로 없습니다. 모든 에너지는 처음에는 천사의 모습으로 오고 시간이 지나면 악마로 바뀌는데 그게 악마로 바뀌지 않게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기술 개발입니다.”
지난 20일 서울경제신문이 만난 원자력 학계의 ‘대부’ 황주호 원자력학회장(경희대 부총장)은 최근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탈원전 정책을 놓고 이 같은 관전평을 내놨다. 원전은 1970년대 오일쇼크로 휘청이던 우리 경제를 구해낸 주역이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에너지 안보를 지켜내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주력산업의 발전을 묵묵히 떠받쳐온 숨은 공신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천사로 왔지만 2000년대 들어 시나브로 원전에 대한 반감이 생겨났고 급기야 현 정부 들어서 악마로 손가락질 받는 상황에 직면한 안타까움을 황 회장은 이렇게 토로했다.
원전에 대한 애정에 있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황 회장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이념적 틀을 벗어던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공포 마케팅과 ‘원전 마피아’라는 국민적 불신에 떠밀려 덮어놓고 원전을 없애겠다는 의사결정을 하기보다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감당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원전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찾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신재생에너지는 안보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럼에도 기술로 할 수 있는 에너지들은 다 갖춰놔야 한다”며 “에너지는 국가가 생존하는 데 있어서 필수요소로 신념과 이념으로 하는 게 아니고 현실”이라고 당부했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앞서 학계와 현장에서 뛰어온,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원전 마피아의 대부 격이 됐다며 허탈한 자조를 내놓는 원자력 석학인 황 회장에게 대한민국 원전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물어봤다. /대담=이현호 경제부 차장 hhlee@sedaily.com
황 회장은 탈원전에 앞서 원전이라는 발전원을 객관적으로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그리고 영화 ‘판도라’ 이후 원전에 대한 비과학적인 공포가 확산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황 회장은 “가압경수로인 한국형 원전(APR-1400)의 사고 확률은 100만분의1로 가동 연수로 계산해보면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가압경수로가 대략 1만년 넘게 운전했지만 사고는 스리마일섬(TMI) 원전사고 한 번이 있었을 뿐”이라며 “TMI 사고 때도 핵연료가 녹았지만 다른 두 사고와 달리 방사성물질이 바깥으로 거의 안 나왔다”고 말했다. 체르노빌은 1950년대 초기 원전기술이 적용된 노형이고 후쿠시마 원전은 ‘싸구려’인 비등형 경수로라 예외적이라며 최근 한국에서 불고 있는 탈원전의 근거가 되는 안전성 문제는 전혀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두 사고 이후 원전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현재 대한민국의 원전 기술력은 세계적 수준으로 시민사회에서 지적할 만큼 원전을 악마로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황 회장은 “우리가 처음에는 복제 설계 기술 95%를 목표로 했고 그 후에는 한국형 원전인 APR-1400의 국산화 95%를 목표로 해 아랍에미리트 수출 당시 이를 달성했다”며 “최근에는 설계코드, 냉각재 펌프, 계측제어 계통까지 모두 국산화했고 특히 사고 시 동력 없이도 안전계통이 바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아이파워’라는 첨단기술도 자체 개발했다”고 했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개발한 APR-1400은 내년 9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인증을 앞두고 있다. 미국에서 자국을 제외하고 이 인증을 받게 되는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이 같은 기술력 덕에 영국이 도시바의 몰락으로 빈 무어사이드 원전에 APR-1400을 지어달라고 요청할 정도다.
황 회장은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의 모델인 독일에 대한 환상도 걷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2015년 3월 개기일식이 있었는데 해가 사라진 90분 동안 죽어버린 태양광 발전설비의 용량이 원전 6기에 해당하는 양으로 당시 독일은 가동할 수 있는 갈탄 발전소를 다 돌리고 옆 나라에서 급히 전기를 수입해서 이를 버텨냈지만 우리는 그게 안 된다”며 “심지어 신재생 설비가 과잉 생산해내는 전력 때문에 독일이 50TWh의 전력을 순수출 하는 데 평균 단가가 1kwh당 50원가량으로 생산 원가보다 낮아 되레 돈을 주고 전기를 보내는 날도 있을 만큼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의 빈자리를 가스발전으로 메우겠다는 정부의 계획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황 회장은 “원전과 석탄 발전은 지금껏 공기업이 해왔는데 가스발전은 민간사업자의 영역”이라며 “지금껏 싼 전기를 공급해왔던 공공의 영역을 민간사업자에게 넘긴다는 건데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탈원전으로 인한 전기요금 인상 우려에 대해서도 “지금은 셰일가스로 인한 가격 하락에 가스 가격이 낮고 이로 인해 전 세계가 가스 발전소를 마구 짓고 있다”며 “가스발전 비율을 높였다가 가스 가격 변동성이 커지면 우리 경제가 과연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원전을 포기할 경우 잃는 게 더 클 수 있다는 조언도 내놨다. 원전과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불신이 깊어 원전을 포기했던 영국의 사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황 회장은 “영국은 1950년대부터 41개의 원전을 지었는데 당시 채택된 흑연가스냉각로(40기)가 문제가 많아서 25기의 해체를 결정했고 이를 위해 원자력해체청(DNA)을 만들었다”며 “해체까지 100년을 기다려야 하고 1기 해체 비용만 3조원가량이 들어가고 있지만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과학적 조사를 통해 국가 차원에서 원전을 다시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은 원전을 포기했던 몇 십 년 사이 원전 기술력이 도태해 이제는 원전을 짓기 위해 다른 나라에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우리도 원전을 버리게 되면 영국 같은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우려였다.
실제로 우리와 자웅을 겨루는 원전 선진국들은 차세대 원전 등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황 회장은 “빌 게이츠와 몇 개 컨소시엄이 미국 아이다호국립연구소 부지 안에 실증 건설을 거의 마친 ‘어번 리액터(Urban Reactor)’가 4세대 원전인데 핵연료를 넣으면 20년 동안 갈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로카쇼무라 원자력복합단지에서 4세대 원전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일본도 최근 프랑스와 합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동향도 전했다.
최근 정부가 탈원전 정책에 발맞춰 다시 공론화하겠다는 사용후핵연료와 파이로프로세싱 개발 문제에도 날을 세웠다. 황 회장은 “탈원전을 하건 원자력을 하건 사용후핵연료는 계속 남아 있는 문제인데 향후 관리 방책을 정할 때 어떠한 절차를 따르라고 정한 법이 다시 공론화할 사안인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이어 “실험실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파이로 프로세싱도 우리 기술력이 앞서 있는 만큼 연구개발로 빨리 가야 하는데 그런 부분은 논리가 안 맞다”고 말했다. 파이로 프로세싱은 사용후핵연료를 재활용해 다시 원자력발전의 핵연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정리=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약력]황주호 원자력학회장
△1956년 부산 △1982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1986년 미국 조지아공대 핵공학박사 △1986~1991년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 △2006~2011년 국가에너지위원회 위원 △2009~2012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 △2010~2013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장 △2014~2017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 △1991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및 국제캠퍼스 부총장 △2016년~ 한국원자력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