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동향

[제조업 뿌리째 흔들린다 <하>] 반도체서 조선·원자력까지...고급 엔지니어 전방위 해외 이탈

씨 마르는 제조업 인재

고급 두뇌 떠나면서 관련 기술·노하우도 유출

中, 조선·항공 등 추격...원전 인재난 배제못해

기업문화 수평 전환...엔지니어 홀대 바꿔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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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고급 엔지니어의 해외 이탈은 여러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당장 업종만 봐도 전방위적이다. 최근 가장 잘 나가는 반도체 분야에서부터 몸집 줄이기에 혈안인 조선 등 구조조정 업종, 탈원전 등 문재인 정부 출범과 동시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신 업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산업 현장 수급을 뒷받침할 대학교와 연구기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더욱 우려를 키운다. 최고 학부의 대학원이 미달 사태를 겪는가 하면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융합한 신산업을 전공한 전문가들은 국내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태도 나오고 있다. 과거 산업구조에 맞춰 기득권에 얽매이고 있는 학계, 장기적 안목으로 미래 산업을 키우지 못하는 기업, 시장을 선도하기는커녕 따라가지도 못하는 정부 정책 등이 빚어내고 있는 참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관료화되고 수직계열화된 대기업이 자금과 인재를 다 틀어진 상황이 계속되면서 제조업의 미래도 암울해지고 있다”며 “수평적 문화로 기업이 바뀌고 엔지니어를 홀대해온 정책도 바뀌어야 희망이 있다”고 지적했다.


◇브레인이 떠나면 산업도 죽는다=과거 조선 업계를 호령했던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지난 1990년대 일본은 공급과잉 우려 속에 구조조정에 나섰다. 그런데 문제는 전문 기술 인력이 대거 현장을 떠나면서 발생했다. 이들이 후발국에 흘러 들어가 일본과의 기술격차를 줄이는 데 큰 공을 세운 것. 그러다 보니 일본은 다시 찾아온 호황기에 인력부족에다 후발국과의 기술 격차 감소로 시장을 대거 내줘야 했다. 구조조정기에 인력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 한창 구조조정 중인 국내 조선업종뿐만 아니라 반도체 분야에서도 핵심인재에 대한 입질은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반도체 굴기를 천명한 중국의 경우 패널업체 차이나스타(CSOT)가 지난 2016년 LG디스플레이 부사장 출신인 김우식씨를 대표로 임명할 정도로 인재 수혈에 적극적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과거 시스템반도체 등 비메모리에 국한돼 있던 중국의 반도체 투자는 이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D램 등 메모리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며 “한국에서 받던 것의 수배가 넘는 연봉을 약속하면서 엔지니어를 유혹하고 있다는 것은 업계가 다 아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조선 업종은 이미 기술격차가 무색한 지경까지 왔다. 최근 프랑스 해운사 CMA-CGM이 발주한 2만2,000TEU(1TUE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9척을 중국이 가져간 것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전직 경제부처의 한 장관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중국 국민들의 특성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조선업의 경쟁력이 앞으로 5년 이상은 앞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이는 다 깨졌다”며 “그 배경에는 핵심 인력의 유출이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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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업계 역시 중국으로의 인력 유출이 많은 업종으로 꼽힌다. 국내 항공사로부터 중국으로 이직한 조종사 수는 2014년 17명에서 지난해 90명으로 급증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84명이 옮겨 가 연간 기준으로는 이직 조종사 수가 150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업체들이 노하우의 단기 흡수를 위해 정년이 다가오는 기장들에게까지 스카우트 제의에 나선 탓이다. 재계에서는 탈원전 정책의 가시화로 인한 손실도 우려하고 있다. 원전도 기술력이 절대적인데 향후 에너지 분야 인재난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정체된 R&D 투자·엔지니어 홀대에 인력 질 저하=제조업의 연구개발(R&D) 분야가 핵심 인재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여기에는 그간 산업의 중심이었던 굴뚝 산업이 도태되고 있는데다 기업 내부의 폐쇄적인 문화와 이공계 홀대 분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당장 올해 서울대 공과대학 대학원의 후기 석사과정이 미달 되기도 했다.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력들의 이탈도 나오고 있다. 국내 대형 조선사의 한 30대 초반 연구원은 최근 회사를 퇴직하고 한 공기업에 사무직군으로 재취업했다. 역학 분야의 석사학위를 소지한 핵심 인력이지만 안정적인 삶을 선택한 것이다. 국내 대표 전자업체의 한 박사급 인력 역시 최근 사표를 쓰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은 공학 분야가 아닌 경영학 석사 과정이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만 놓고 봐도 대표이사는 물론 부사장급의 고위 임원에 오른 사람들 중에서 엔지니어 출신은 손에 꼽을 정도”라며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비전을 찾기 어려워진다”고 전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인력과 기존 학제의 간극도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취업하려면 기계과가 유리하다는 얘기가 아직까지 나올 정도로 이공계의 전공 분포는 20~30년째 변화가 없다”면서 “그러다 보니 산업계가 신진 전문가 세력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민규·김우보기자 cmk25@sedaily.com

조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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