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외채권 시장에서 안정적인 투자처로 인기를 끌던 한국항공우주(KAI) 회사채가 순식간에 ‘미운오리새끼’로 전락했다. 적자를 내며 신용평가사가 일제히 신용등급을 하향 검토하겠다는 의견을 밝히면서 4,000억원가량의 회사채가 거래 절벽을 맞았다. 전문가들은 지난 대우조선해양(042660) 사태와 같은 대규모 손실까지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단기적으로 투자심리 위축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28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현재 KAI의 회사채 3개 종목의 발행잔액 합계는 4,000억원이다. 지난 22일 만기를 맞은 2,000억원가량의 물량은 기업어음(CP)을 통해 소화한 것으로 보이지만 남은 4,000억원은 투자자들의 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 국내 대형 증권사의 한 채권담당 매니저는 “현재 장외에서 매물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일부 운용사에서는 갑자기 기관 환매 요청이 많아져 환매를 연기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등급 하향 검토 대상 등재 이후 시장에 매물이 늘어나 KAI CP 등을 편입한 펀드의 환매 요청까지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달 16일 동양자산운용은 ‘동양 큰만족 신종 MMF 3호’ 환매 연기 결정을 공시했다. 기관들이 전체 펀드 잔액 좌수의 89%를 환매 요청했기 때문이다. 기관들은 동양 큰만족 신종 MMF 3호가 KAI CP를 일부 편입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담을 느껴 발을 빼는 모양새를 보였다.
동양자산운용의 머니마켓펀드(MMF)에서 보듯 14일 KAI의 외부감사인 삼일회계법인이 반기보고서에 ‘적정’ 검토의견을 부여하며 한고비를 넘겼다고 판단했지만 시장은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신용평가사들이 연이어 KAI의 신용등급을 하향 검토하며 상황은 다시 나빠졌다. 올해 상반기 영업실적이 적자를 기록한 가운데 방산비리 등을 이유로 납품이 지연되면서 한동안 부진한 실적이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신용평가사들은 “기동헬기 수리온 납품 재개와 이라크 T-50 수출 관련 차입금 축소 여부가 KAI의 향후 신용등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방산비리와 분식회계 관련 검찰 조사가 진행되면서 수리온 납품 재개 시점을 확정할 수 없는 만큼 실제로 신용등급 하향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수리온 납품이 지연될수록 영업 수익성 회복도 더디게 진행되기 때문에 재무구조 악화에 따른 신용등급 강등은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부정적 전망이 이어지면서 채권 시장에서 KAI 회사채에 대한 손절매 움직임이 커졌다. 전문가들은 KAI 회사채로 인해 한동안 유통 시장이 침체기에 놓일 것으로 보고 있다. 박진영 현대차투자증권 연구원은 “8월 은행채 발행이 완화하면서 투자심리 개선을 위한 기반이 마련됐지만 KAI 이벤트가 발생해 또다시 투자심리가 나빠지고 있다”며 “KAI는 안정적인 마진이 보장되는 방위 산업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대우조선해양과 같은 대규모 손실 발생 가능성은 낮지만 당분간 AA급 회사채에서 일시적인 투자심리 저하는 막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채권 시장과 달리 주식 시장에서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지분을 확대했다는 소식에 주가가 반등했다. 이날 KAI는 전 거래일 대비 5.88% 오른 4만5,900원에 장을 마쳤다. 최근 주가가 최저치까지 하락하면서 자산운용사와 회사 임원들이 저가 매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적 우려가 여전한 만큼 투자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류승협 한국신용평가 평가본부 실장은 “올해 6월 말 기준 17조1,000억원의 풍부한 수주 잔액을 감안하면 향후 외형 확대 여지는 있지만 수리온 등의 매출인식 지연 가능성, 양산 과정에서 추가 비용 발생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현재 등급 수준에 부합하는 실적을 창출할지 불투명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