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여명] 4류 정치에 갇힌 1류 기업

홍준석 산업부장

文정부 적폐청산 여론에 휩쓸리며

이재용 묵시적 청탁 빌미로 실형

기아차 통상임금訴 '신의칙' 제외

글로벌기업 절체절명 위기 내몰아

홍준석 산업부장




이건희 삼성 회장은 지난 1995년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말해 김영삼 정부로부터 곤욕을 치렀다. 곧바로 보복성 세무조사 등의 압박을 받자 삼성이 결국 사과했지만 정치권 등 우리 사회 수준을 여실 없이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정치권은 1류가 됐을까.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이 지났지만 마치 기업을 전투하듯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일련의 행위를 보면 여전히 바뀐 것은 없는 것 같다. 권력을 앞세운 정권의 독주는 예나 지금이나 만고불변의 법칙이 맞나 보다. 아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과 현대차의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여전히 군기를 잡기 위해 목청을 높일 뿐 정작 정부가 해야 할 상황에서는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오히려 예전보다 못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1심에서 5년 실형을 선고받은 점은 여러 상념에 잠기게 한다. 많은 법조인들이 지적하듯 직접 증거가 부족하고 스모킹건도 없는 상황에서 법원이 법 논리를 따지기보다 ‘묵시적 청탁’이라는 모호한 근거를 내세워 이 부회장을 옭아맨 것은 문재인 정부의 압도적 지지에 따른 여론재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재벌개혁에 나선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대표로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도 많다. 일각에서 유럽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벌어졌다는 원색적 비난까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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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번 사건의 본질은 재판부가 밝힌 대로 박근혜 대통령이 기업들에 돈을 요구했고 기업은 현실적으로 외면하지 못했으며, 이 과정에서 불법 행위가 자행된 것이다. 과연 어떤 기업들이 서슬 퍼런 권력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을까.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 중에 현안 없는 곳이 어디 있느냐”며 “‘묵시적 청탁’이라는 애매한 기준으로 엮으려 들면 기업 총수들이 다 잡혀 들어갈 것”이라고 항변한다.

삼성만큼이나 현대차그룹의 상황도 납득하기 어렵다. 31일 재판부는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1심 선고에서 정기상여금과 중식비 등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라며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기대와 달리 이번 소송의 핵심 쟁점이었던 ‘신의성실 원칙(신의칙)’을 적용하지 않은 것. 2013년 갑을오토텍 통상임금 소송 때 신의칙을 근거로 소급적용 불가를 내렸던 판결과는 정반대다. 그간의 통상임금에 대한 노사합의와 사회적 관계, 자동차 및 산업계 전체에 미치는 막대한 부정적 영향은 고려하지 않고 ‘고정성’ 등의 좁은 법리 해석에만 머문 판결이라고 업계는 울분을 터뜨렸다. 더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은 ‘기아차가 충분히 지급 여력이 있다’는 재판부의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다. 현대기아차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 조치로 중국에서 상반기 판매량이 반 토막나고 부품업체 대금지급 여력이 없어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글로벌 시장점유율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기아차 경영이 어렵지 않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언론이 연일 현대기아차의 위기를 대서특필하는데도 재판부만 딴 세상에 있다”며 답답해했다.

그렇잖아도 요즘 재계는 검찰·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 등의 전방위 사정 압박 속에 신음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기업을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삼고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및 법인세율 인상 등 감내하기 힘든 정책에도 기업들은 찍소리 한 번 못 낸다. 반론이라도 할라치면 반기업 정서에 몰매 맞고 심지어 반부패 집단으로 매도당한다.

과연 이게 ‘정책 파트너’인 정부와 기업 간의 정상적인 관계인지, 바람직한 소통인지 묻고 싶다. 칼은 정치권력이 쥐고 있지만 국민들 대다수는 여전히 도덕성을 가장 의심받는 집단으로 정치권을 꼽는다. 정치권이 적폐기업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초일류기업의 총수인 이 부회장이 4류인 우리나라 정치에 의해 발목이 잡혔다는 사실을 병석에 누워 있는 이 회장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jshong@sedaily.com

홍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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