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후8시 무렵, 지하철 2호선 이대역 인근의 한 간판 없는 가게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가게를 지키던 젊은 남성은 책방 한쪽에 조그마한 스크린을 펼친다. 빔프로젝트를 연결하자 작은 영화관이 생겨났다. 관객 10여명을 위한 자그만 영화관, 독립책방 ‘퇴근길 책한잔’의 저녁 풍경이다. 이날 상영회에 참가한 장진복(27)씨는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운영하는 서점이라 호기심이 발동했는데 기대했던 대로 서가에서 책을 골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웃었다.
디지털 세상이 오면서 만지고 체험하는 아날로그 세계가 벼랑 끝에 몰렸다. 불과 2~3년 전 동네서점들이 비디오가게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팽배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독서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데다 대형마트와 대형서점의 사세 확장에 이어 온라인 서점이 할인과 사은품으로 독자들을 끌어모으면서 동네책방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하지만 비디오가게와 달리 동네서점은 멸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서점의 부흥을 이야기한다. 직장인들이 퇴근 후 책방에 모여들고 저자를 만나거나 독서모임에 참여하는가 하면 맥주나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기도 한다. 수요가 공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태원 해방촌, 연남동, 이대 앞(대현동) 등 젊은이들의 거리를 중심으로 생겨나던 서점들이 이제는 마을로, 지방으로, 쇠락한 구 도심으로 침투하고 있다.
이들 작은 서점의 활동은 전통적 서점의 규격을 벗어나 더욱 과감해지고 있다.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땡스북스는 서점만의 색깔을 담은 독립출판물을 직접 찍어내고, 예약 상담으로 책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책을 추천해주는 사적인 서점, LP 감상회, 책 제본수업, 블루레이 상영회까지 매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까지 서점의 활동영역이 점차 광범위해지고 있다.
물질소비 중심에서 정신적 만족감을 중시하는 경험소비의 시대로 이동하면서 각 공간이 가진 뚜렷한 개성과 전문성을 소비하는 공간으로서 서점의 가치도 새롭게 조명된다. 특히 아무 사전정보도 없이 책을 한 권 고르고 실패할 여유조차 없는 현대인에게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콘텐츠커넥터의 역할은 갈수록 커진다. 여기서 콘텐츠커넥터란 중요한 정보를 빠르고 넓게 확산되도록 돕는 매개자로 최근 생겨나는 서점에 부여된 주요 역할 중 하나다. 최인아책방의 서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각계 유명인사의 추천 책은 추천자들과의 간접소통을 통해 책을 추천받을 수 있는 창구가 되고 북바이북의 서가에 붙은 ‘책꼬리’는 마치 온라인쇼핑몰에서 볼 수 있는 다른 고객들의 상세 구매평처럼 독자들이 우연히 발견한 책을 선뜻 구매하도록 돕는다.
이 같은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반영하는 서점이 바로 전문서점이다. 유희경 시인이 운영하는 시 전문서점 위트앤시니컬, 추리소설 전문서점 ‘미스터리 유니온’ 청소년 인문학 서적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부산의 인디고서원, 음악 전문서점인 초원서점, 독립출판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유어마인드 등은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겸비하고 관련 콘텐츠를 선별·추천하는 서점 주인이 그 자체로 매력 포인트다. 20년간 독서인구가 줄고 출판시장이 기운 사이 일반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마니아들이 즐길 만한 깊이 있는 콘텐츠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전문서점은 다르다. 특정 분야를 파고들면서 제공하는 정보의 깊이는 더욱 깊고 세밀해졌다. 궁극적으로 이들이 꿈꾸는 것은 고양이든 음악이든 특정 테마로 사람을 모이게 하는 플랫폼이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은 “베스트셀러 위주로 책을 읽는 대신 나만의 독서 취향을 쌓기 원하는 지금 세대에게 서점 주인의 큐레이션에 대한 의존도는 커질 수밖에 없다”며 “독서 취향이라는 것은 단기간에 생기기 쉽지 않는데 지적 허기를 채우려는 욕구가 커질수록 서점의 큐레이션에 대한 의존도는 더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은영·정혜진·우영탁기자 supia927@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