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스타 영화

[SE★인터뷰]‘시인의 사랑’ 양익준, 인생의 다음 챕터를 넘기며

양익준, “지질함도 겪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인생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겠어요.”

심드렁한 표정과 헝클어진 머리칼, 웃자란 수염과 뿔테 안경을 쓴 시인 ‘택기’ 아니 양익준이 걸어 들어온다. 수시로 ‘깔깔깔’ 제스처를 취하는 양익준의 웃음소리는 조용한 인터뷰 현장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그는 이를 한마디로 “생존형 웃음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다.

“과거로 따지면 살아남기 위한 웃음이었는데 지금은 긍정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아요. 단역, 엑스트라를 지나고 촬영장에 감독으로 가게 됐어요. 사전미팅 없이 현장에 가서 연출부, 제작부, 막내까지 만나야 했어요. 두려우니까 현장 자체에 익숙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웃을 수 밖에 없었어요. 위축되기만 하고 끝나버리는 건 원치 않았어요.


환경에 적응하기 해 웃기 시작했는데, 이 웃음이 빨리 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사실 연출 할 때 이 웃음이 유용하게 쓰여요.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이 감독을 어려워하는 게 있는 데, 전 ‘깔깔’ 되면서 스태프랑 춤도 추고 하니까요. 웃음이 약간 분위기를 여유롭게 만들어줬죠.”

배우 양익준 /사진=조은정 기자배우 양익준 /사진=조은정 기자


영화 ‘시인의 사랑’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배우 양익준은 웃음으로 다가와, 결코 웃음으로 끝나지 않는 진실된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줬다. 그의 ‘생존형 웃음’은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천천히 곱씹게 했다.

지난 14일 개봉한 ‘시인의 사랑’(㈜영화사진, 미인픽쳐스, 감독 김양희)인생의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사랑’을 맞닥뜨린 시인, 그의 아내 그리고 한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감성 드라마. 팍팍한 현실과 아름다운 시 세계에서 고뇌하는 시인 ‘택기’(양익준), 시인을 구박하면서도 세상에서 그를 가장 사랑하는 아내 ‘강순’(전혜진), 그리고 이들 앞에 나타난 함부로 아름다운 소년 ‘세윤’(정가람)이 주인공이다.

‘시인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꼭 한번은 찾아올 사랑을 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해 시인의 사랑, 시인 아내의 사랑, 시인의 눈에 비친 소년의 사랑이 한번씩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파열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특히 시인과 소년의 사랑이 부딪치는 지점을 퀴어영화로 바라보는 관객 역시 있을 듯 하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월수입 30만원에 감상적인 시를 쓰며, 팍팍한 현실과 아름다운 시 세계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시인 현택기를 양익준이 연기한다. 양익준은 “시인이 좋아한 게 소년이지 시인이 소년을 좋아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택기’ 그가 좋아한 게 어떤 소년이었어요. 택기가 가진 정서에 많이 공감해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존재를 사랑하다보면 이성이든, 동물이든, 동성이든 상관 없는 거요. 바람이 사랑스러워서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택기도 다양한 상황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다양한 사람들 중 한 명일 수 있죠. 그런 순간, 지점을 경험하게 된 거죠.”

“택기도 자기 감정에 대해 완벽하게 알겠어요. 그것을 손을 대보느냐 안 되보느냐가 달라져요, 그런데 택기는 인생의 한 지점에 손을 대본 거죠. ‘어흥’ 해 본거겠죠.(웃음). 영화 속에서 택기 엄마가 말하잖아요. ‘젊다. 지나고 나면 그놈이 그놈이고, 그 년이 그 년이다고’ 고. 엄마 말 투도 좋았고 대사 자체가 좋았어요. 택기도 그 감정이 인생 안에서 온 특별한 어떤 감정일 수 있어요. 어떤 하나의 상황을 맞이한 상태겠지. 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여자나, 남자의 차원이 아니라고 봤어요.“

배우 양익준배우 양익준


배우 양익준배우 양익준


양익준은 관객들이 다 읽어내는 캐릭터는 재미 없다고 했다. 그는 관객들이 지속적으로 궁금해하는 인물로 다가갔으면 했다.

“택기를 볼 때 택기 안에 다양한 또 다른 정서가 있는 것 같아요. 전 배우로서 미묘하게 살려내야 하는 숙제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다 읽어내버리는 캐릭터는 안 됐으면 해요. 관객들이 설명이 가능한 캐릭터라면 재미 없지 않을까요.”

“하물며 내 일기를 쓰면서도 내가 나를 검열하고 있는데, 택기도 그런 것에 대해 되게 싸우고 있지 않을까요. 와이프가 있는데 와이프 이외의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요. 유추해보면 택기 앞에 나타난 소년이 자신의 어떤 걸 풍성하게 해주고, 창작가로 이끌어줘 내가 반응하고 느끼고 있어요. 그 상태에선 상대가 여성이냐, 남성이냐를 상관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안에 있는 와이프, 소년 세운의 친구들을 의식하고 있는거죠.”


다른 대상을 사랑하게 된 시인은 오랜 시간 살을 부비며 살아온 아내를 떠나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시인은 매달리는 아내를 내칠 뿐, 자신의 속 마음을 명확히 표현하진 않는다. 그 순간 시인의 선택은 이것 뿐이었을까.

관련기사



“그 순간엔 그럴 수 밖에 없어요. 확실하다고 말 하는데 확실성은 50프로 밖에 안 되거든요. 그렇다면 확실히 이게 맞다면서 이성적으로 어느 누구를 설득할 수 있나요? 그 순간 이게 맞다고 해서 갔는데 영화가 완성된 다음엔 아닐 수도 있어요. 반대로 다른 게 맞다고 들어갔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시인은 그 당시엔 이 선택을 했다는죠. 그거였었을 수 밖에 없어요.”

사람의 감정은 설명하는 순간 진실성이 퇴색된다. 이를 두고 양익준은 “피곤해진다”고 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라는 질문을 하듯. 그렇게 되면 아이는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엄마고 아빠고 다 싫어진다”고 했다.

“택기가 아내 강순이를 떠나려고 하는 순간에 뭔가 작용해요. 그 당시엔 그것 밖에 없는 선택이었고, 이 영화에선 그 선택을 한 이야기를 해야 했어요. 되게 쉬운 건데 이 이야기를 입으로 꺼내는 순간 어려워요. 이 시나리오를 봤을 때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었고 다 납득이 됐어요. 설명하는 순간 피곤해지는거죠. 택기와 강순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그 선택의 순간엔 혼자 그런 감정상황 안에 있는 거죠. 사랑이란 게 둘이 같이 느끼느냐. 하나 하나 다르게 느끼냐의 차이죠. 시침이랑 초침을 예로 들면, 사랑에 대한 감정이 ‘띵띵’ 넘어가서 다시 되돌리기 힘들어요. 출발한 버스도 다시 세우기 힘들어요. 열 받아서라도 어떻게든 세울 수는 있겠지만 택기는 이런 감정 상태에 놓인 게 아니에요.”

양익준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똥파리’이다. 양익준은 감독과 각본, 주연까지 1인 3역을 완벽하게 해낸 영화 ‘똥파리’에서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용역 깡패 ‘상훈’역을 완벽하게 소화, 국내뿐 아니라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후 <계춘할망><춘몽>등 영화는 물론, [밤을 걷는 선비], [괜찮아, 사랑이야] 등 드라마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력을 선보여왔다.

양익준은 “시인의 사랑이 12년 전 헤어진 ‘똥파리’ 같아요.”라고 소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똥파리’ 때 에너지를 엄청 쏟았어요. 저에게도 어려웠던 숙제 같았어요. ‘시인의 사랑’은 처음에 대본을 보고 되게 오만하게 다른 작품보다 쉽겠는데라고 생각했어요. 제 입장에서 좋고 잘 읽혔거든요. 그 당시에도 잘 이해가 되고 공감도도 있었어요. 그런데 2번 3번 읽어 보고 ‘왜 이렇게 어려워’라고 했어요. 읽어갈수록 어려워지던걸요.”

‘똥파리’와 ‘시인의 사랑’에선 견디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양익준은 “여성이 견뎌줬기 때문에 그 가정이 유지가 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견디는 분들이 애처로워요. ‘똥파리’ 때 여자주인공 꽃비가 하는 말이에요. 여성이 남아서 견뎌줬기 때문에 그 가정이 유지가 되고 있어요. ‘똥파리’에서 꽃비 캐릭터가 남성이었다면 누구도 안 견뎌줬겠죠. 남성끼린 누구도 안 견뎌줘요. 엄마 때문에 가정이 유지가 되는거죠.어. 무슨 이야기야? 깔깔”



‘시인의 사랑’은 끝나지 않은 택기, 세운, 강순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끝나지만 그 뒤에 살아갈 택기, 강순, 소년 모두는 단단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강순이가 아름답고, 세윤이도 아름다고, 택기도 다 아름답다고 봐요. 인생 안에서 이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이들은 모두 노력했어요. 정말 지질할 정도로. 연애를 하면서 진짜 막장까지 가 잖아요. 내가 이런 모습까지 보여야 하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부턴 성장할 수 있다고 봐요. 지질함도 겪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인생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겠어요.”

택기, 그리고 양익준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건강한 몸통을 키워나갈 듯 하다. 그렇게 양익준의 다음 챕터는 넘어가고 있었다. “가지가 잘 뻗어나기 위해선 나무 몸통이 튼튼해져야 해요. ‘시인의 사랑’은 택기의 나무 몸통이 튼튼해져 가는 과정이기도 해요. 아이가 시간이 지나서 청소년기를 지나 점차 자라요. 어떻게 뻗어나갈지 모르지만 튼실한 몸통이 있다는 건 건강한거잖아요. 누구랑 살든 잘 살면 되는 거고, 아름답게 살면 되는거죠.”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정다훈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