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대군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와 신하들이 고립무원 속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던 47일을 다룬 작품이다. 역사적 사실인데다 원작 소설도 베스트셀러인 까닭에 그 자체로 영화의 스포일러일 정도로 관객들에겐 새로울 것이 없다. 두 주인공인 화친파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역시 청과 화친을 주장하고 청과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입장이 바뀌거나 새롭게 해석되지도 않는다.
다만 영화 ‘남한산성’에서 오롯이 빛나는 캐릭터 김상헌의 시선과 심경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역사의 울림이 번진다. 내달 3일 ‘남한산성’ 개봉을 앞두고 김상헌 역으로 열연한 배우 김윤석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선택은 처음부터 오직 김상헌이었다고 했다.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콘트라스트가 가장 크고 마지막에 깨달음을 얻는 것도 맘에 들었죠. 김상헌의 논리가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김윤석이 ‘남한산성’에서 보여준 상헌의 강인함은 전쟁의 고통과 치국에 대한 번민의 결과물이었다. “자신의 논리를 굽히지 않는 건 상헌과 명길이 같아요. 상헌의 논리를 자세히 보면 국경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면 화친할 수 있지만 이미 우리 집 안방까지 온 청과 화친을 한다는 것이 선례를 남기는 것이죠. 목숨 걸고 덤비지 않으면 또 오고 또 온다는 거죠.” 그러면서 그는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당시 역사에 대한 해석도 내놓았다. “명길은 광해를 폐위시키는 데 일등공신이었어요. 중립외교를 주장하던 광해를 그럼 왜 폐위 시켰냐는 말이죠. 광해가 맞는데.” 김윤석의 해석처럼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관객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상헌은 영화 도입부에서 송파강을 건널 때 도움을 준 나루터 노인을 죽인다. 임금이 강을 건너도록 도움을 줬는데 곡식 한 톨 얻지 못했으니, 청나라 군사에게라도 길을 안내하면 곡식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나루터 노인을 말이다. 그러던 그는 남한산성에 갖혀서는 천민 대장장이 서날쇠(고수)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가 하면서 민초들의 어려움을 헤아릴 줄 아는 위정자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날쇠에게 나루터 노인의 손녀를 맡아달라며 무릎 꿇어 절까지 하기에 이른다. “모든 게 상식을 벗어난 전시 상황에서 상헌은 청 나라 군에게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는 노인을 그냥 둘 수 없었겠죠. 원작 소설에서는 노인을 보고 “이게 백성이구나, 백성일 수 있구나”라고 속으로 말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영화에는 이런 깨달음과 번민은 축약됐어요. 이후 나루터 노인의 손녀인 나루가 남한산성으로 홀로 들어왔고, 이후 나루를 대하는 상헌의 심정은 죄책감이었어요. 극한 상황에서 백성들의 삶을 지켜보고 상헌은 깨달음을 얻었겠죠.”
영화와 원작소설은 대체로 일치하지만 다른 부분은 김상헌의 자살이다. 그러나 김윤식이 빚어내는 상헌의 자살은 리얼하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로 그가 자살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여생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자살로 정리를 해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라며 덧붙여 말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청에 항복하고 7일을 식음을 전폐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요. 그리고 안동으로 돌아가서 한 번도 관직에 오르지 않죠.”
‘남한산성’은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김훈의 소설이 원작인 까닭에 모든 대사에서 말의 힘이 느껴진다. 상헌과 명길 각자의 대사는 물론이고 이 둘이 임금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논쟁은 성 안에서의 전쟁을 보듯 치열하고 또 맹렬하다. 특히 김윤석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오랜만에 연극 대사를 하듯 했어요. 대사와 문장의 전달이 심지어 조사까지도 말뜻의 전달이 워낙 중요했죠. 셰익스피어 극 같은 경우도 처음 하면 어색한데 계속하면 희한하게 리얼리즘이 붙어요. 지금은 쓰지 않는 말들이 입에 잘 붙지 않아도 그 안에서 리듬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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