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학교 갔다 왔어요. 간식 주세요.”
지난 26일 초등학교 수업을 마친 10여명의 아이들이 가방을 맨 채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단지 카페로 뛰어들어왔다.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던 엄마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맞이한다. 아이들이 과자와 토스트·찹쌀떡을 먹는 동안 옆방에서 또 다른 아이들은 보드게임과 공기놀이에 푹 빠져 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한가족’이라는 개념으로 꾸려진 서울 은평구 마을생활공동체 공간인 ‘물푸레북카페’의 오후 풍경이다. 물푸레북카페는 은평구 마을주민 15명이 2012년부터 은평뉴타운 미분양 상가 두 곳을 개조해 꾸민 마을문화공간이다. 5세 미만 아이들을 함께 키울 공간이 절실했던 주민들이 “우리가 아이들을 다 함께 돌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며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공동체 공간에서 아이들을 함께 돌보는 것은 물론 100인분의 음식을 함께해 여러 가족이 나눠 먹는다. 또 함께 손뜨개질과 민화, 재즈를 배우며 우정을 다지기도 한다.
물푸레북카페를 기획한 백찬주 에코상상사업단 대표는 “마을 사람들은 누구의 자녀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의 자녀라는 개념으로 동네 아이들을 서로 돌본다”며 “공동육아와 더불어 함께 소통하면서 개별 가족 안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다른 엄마들을 만나 해결하고 협업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다양한 이유로 가족의 해체가 속속 이어지는 가운데 물푸레북카페와 같은 새로운 가족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혈연 중심이던 가족이 산업화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면서 지역 또는 사회·국가가 가족의 역할을 일정 부분 담당하는 확장된 개념의 ‘가족’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푸레북카페 외에도 대구시 마을공동체만들기지원센터, 경기도 따복공동체 등 전국 곳곳에서 이 같은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마을 사람 모두가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서로 돕는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모여 다 함께 ‘돌봄’을 공유하며 가족의 개념을 넓히고 있다. 김명신 서울시건강가정지원센터장은 “최근 1인·2인가족 등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가족의 개념을 반드시 혈연 중심의 전통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며 “이제는 시대가 변한 만큼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돌봄의 대상을 적극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역 또는 사회 구성원을 가족으로 보는 새로운 개념의 접근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지역사회와 국가 등이 가족의 역할을 하는 확장된 개념의 가족 시스템은 사실 해외에서 먼저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동양적 유교사상이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서구에 비해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는 독일이다. 독일은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족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독일 각 지역에는 ‘가족센터’가 구축돼 있다. 이곳에서는 아이 돌봄뿐만 아니라 부부 문제 상담, 자녀 진로 상담 등 다양한 가족 문제 해결을 지원한다. 미국은 가족복지협회가 가족 간 갈등을 치료하고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기존 가족 관계의 발전을 위해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동양권에서는 우리나라처럼 급격한 고령화로 사회변화를 겪고 있는 일본에서 가족의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일본은 각 지역자치단체별로 가정·가족과 관련한 기관이나 협회들이 많아 이를 중심으로 같은 지역 주민들이 모이고 서로를 돌볼 수 있는 활동을 지자체가 적극 지원한다. 가족의 돌봄이 가장 절실한 아이와 노인을 가정에 맡겨놓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돌봐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가족학을 전공한 안진경 동작구가족지원센터 부센터장은 “현대사회에서는 가족 단위가 축소되면서 가족이 기존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가족 개념이 지역사회로 확대되고 있다”며 “가족 개념의 확대는 단절된 인간사회의 관계를 지역사회 중심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커뮤니티 공간에 있는 사람들끼리 적극적인 소통을 해야만 확대된 가족이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정욱·신다은기자 myk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