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행금지 시간 집 밖을 나선 이비(나탈리 포트만)는 후미진 골목에서 험상궂은 사내들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처한다. 사내들은 다름 아닌 국가순찰대원들. 이때 가면을 쓰고 나타난 사나이 브이(휴고 위빙)가 현란한 칼 던지기 솜씨를 뽐내며 이비를 구한다. 부당한 국가권력의 억압에 대한 불복종을 주제로 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첫 장면이다. 브이는 이비에게 말한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선 안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지.”
영화는 2040년 제3차 세계대전 이후 지독한 통제사회로 변모한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정치적 성향은 물론, 성적 취향만 달라도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무서운 사회다. 거리 곳곳에 카메라와 녹음 장치가 설치돼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 대상이고, 들을 수 있는 음악과 읽을 수 있는 책은 제한돼 있다. 예술작품의 선택권까지 정부가 독점하며 언론조차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세상은 평온하다. 그 어떤 의문도 반론도 존재하지 않으니 정치적 불복종도 있을 리 없다.
그러던 중 브이가 방송국을 점령해 메시지를 전한다. “진실이란… 이 나라가 단단히 잘못됐단 겁니다. 잔학함, 부정, 편협함, 탄압이 만연하고 한때는 자유로운 비판과 사고, 의사 표현이 가능했지만 이제 온갖 감시 속에 침목을 강요당하죠. 어쩌다 이렇게 됐죠? 누구의 잘못입니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고 대가를 치르겠지만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건 바로 여러분입니다.”
영화에서 브이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나온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영국의 제임스 1세 정부의 독재에 맞서 의회를 폭파시키려다 처형된 실존 인물. 이후 그는 영국에선 실패한 반역자의 본보기였지만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선 불복종과 저항의 상징으로 400년이 넘도록 기념돼왔다.
근래 들어서는 브이와 똑같은 가면을 쓰는 국제 해커집단 어나니머스(anonymous)가 활약 중이다. 아나키즘과 정보의 자유를 표방하는 이들은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반감을 드러내 왔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북한의 긴장 고조로 한반도에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영화 속이든 현실에서든 독재자들은 거짓과 탄압을 멈출 줄 모른다. 영화에서도 “국민들에게 우리가 왜 필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라”며 테러와 재난, 전염병 등에 대한 뉴스를 계속 쏟아내게 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전형적 ‘공갈전략’이다. 공갈전략이란 상대를 기만해 자신의 약점을 감춤으로써 판세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어가는 속임수다. 김 위원장이 핵 보유를 통해 자신의 약점을 감춤과 동시에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끌어내려 하는 것을 공갈전략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핵 공격 위협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 약화를 만회함과 동시에 무기판매와 통상협상 등에서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려는 것 또한 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올해 노벨평화상은 전세계 핵무기 폐기를 위해 노력해온 비정부기구인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에게 돌아갔다. 북핵 해결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더욱 높이게 될 반가운 소식이다. 그리고 ICAN은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핵무기 보유는 물론 핵무기 사용 위협도 불법이다. 둘 다 멈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귀담아 들어야 할 경고다.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무모한 공갈전략을 멈추고 대화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인류의 평화를 해치는 그 어떤 공갈도 용인받을 수 없다. /문성진 문화레저부장 hnsj@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