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지난달 29일 금호타이어에 대한 자율협약을 결정한 뒤 기자간담회를 열어 “국정 방향에 발맞춰 기업은 살리고 일자리는 지키는 식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직원감축 등이 뒤따르는데 이를 줄이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전문가나 시장이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구조조정의 그림을 잘못 그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을 총괄했던 금융당국의 전직 관료는 “손에 피를 묻히는 게 구조조정인데 너무 이상적으로만 접근하는 것 같다”면서 “위기 때는 정확한 진단, 타이밍, 과감성이 구조조정의 생명인데 아무래도 그런 절박함은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촌평했다. 북핵 리스크 등에 따라 대외여건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20년 전처럼 선제적 구조조정의 적기를 놓쳐 나라 전체가 부도 위기로 몰리는 악몽이 다시 한 번 현실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한진해운 파산과 같은 구조조정 실패 사례가 다시 반복되면 시장에 일순간에 공포심리가 퍼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위기를 겪을 수도 있다는 게 금융권의 진단이다.
20년 전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된 ‘한보 사태’도 결국 상황을 정확하게 들여다보지 못한데다 구조조정의 시기를 놓친 게 화를 키웠다. 1996년 당시 재계 14위권이었던 한보철강은 약 60곳에 달하는 금융회사로부터 대출을 받아 아슬아슬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관리해야 할 감독 당국은 비상벨을 울려보지도 못하고 이듬해 1월 한보 부도 사태를 맞이했다. 감독 당국이 은행감독원·증권감독원·보험감독원 등 업권별로 쪼개져 있어 누구도 한보철강 전체의 여신 상태를 통합해 들여다보고 관리하지 못했던 탓이다.
정부 대응도 답답했다. 한보에 놀란 재정경제부는 같은 해 4월 금융기관들을 불러 모아 ‘부도유예협약’을 맺도록 종용했다. 은행 여신이 2,500억원 이상인 대기업에 대해 2개월 동안 채권상환 의무를 면제해 부도 시기를 뒤로 미루는 제도였다. 부실기업에 대한 고강도 구조조정에 나서야 할 판에 시간 끌기 식 땜질 정책을 선택한 셈이다. 연말 대선을 앞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미봉책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물론 부도유예협약은 이렇다 할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기아차는 7월 적용 대상이 된 뒤 석 달 만인 10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진로 역시 두 달 만인 9월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에 돌입했다. 해태와 뉴코아·한라그룹 등도 줄줄이 부도를 맞았다.
문제는 최근 상황이 20년 전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금융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는 대선을 앞둔 정치적 상황과 강성 노조 득세 등에 맞물려 구조조정이 지연되면서 위기를 키웠다”며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친(親)노조 정부가 구조조정의 고삐를 느슨하게 놓으면 위기를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동조선해양·STX조선해양 등 중소 조선사 구조조정이다. 수출입은행은 성동조선에 대한 실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당초 이달 내놓을 계획이었던 보고서 완료 시기를 다음달로 미뤘다. 표면적으로는 향후 수주 물량과 조선업 경기에 대한 평가가 어려워 실사가 늦어지고 있다는 게 수은의 입장이다. 하지만 채권단 내부에서는 실사 결과 청산가치가 존속가치보다 큰 것으로 나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실사 보고를 최대한 미루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냉정하고 신속한 판단으로 구조조정에 나서야 하는데 정치 여건과 같은 외부 환경만 살피다 속절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는 셈이다. 조선업계에서는 성동조선 구조조정이 곧 중소 조선업계의 생존 마스터플랜인데 너무 시간을 끄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지방선거가 있는 내년 6월은 지나야 구조조정의 윤곽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 때문에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아야 할 정부 내부에서 위기 감각이 떨어진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로 구조조정 당국 안에서는 올해 상반기 대우조선해양 문제를 일단 마무리 지은 뒤 ‘이제 큰 산은 넘은 것 아니냐’는 인식이 팽배하다. 금호타이어나 성동조선 등은 대우조선에 비해 ‘덩치’가 작아 설령 문제가 생겨도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부처끼리 “서로 구조조정 업무를 맡지 않으려고 해 큰일”이라는 우려도 크다.
하지만 GM대우 철수와 같은 돌발 악재가 아직 물밑에 잠복해 있고 평시가 아닌 위기 상황에서는 작은 변수가 대형 악재로 돌변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거시국제연구실장은 “지금의 기업 구조조정은 과거와 달리 빚만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장산업으로 재편해야 하는 숙제까지 포함하고 있어 과거보다 더 어려운 과제”라고 말했다.
/서일범·이주원기자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