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92년에 설립된 제너럴일렉트릭(GE)은 1896년 미국 다우존스산업지수가 출범할 당시 지수에 포함돼 있던 12개 상장사 중 유일한 ‘생존 기업’이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기업들이 명멸(明滅)했지만 GE만은 간판을 내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130년 가까이 GE가 글로벌 기업의 명맥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감한 변화와 혁신이 자리하고 있다. GE는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벗어나 헬스케어와 신재생에너지·금융 등 다양한 분야로 영역을 확대하며 카멜레온 같은 변화무쌍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GE의 요즘 화두는 디지털화다. 제프리 이멀트 GE 회장은 2015년 10월 “우리의 목표는 디지털 회사”라며 “2020년까지 100억달러 가치의 10대 소프트웨어 회사로 성장하겠다”고 선언했다. GE는 사물인터넷(IoT) 데이터 분석 플랫폼인 ‘프레딕스’를 개발하고 클라우드 서비스로 출시하는 등 소프트웨어 회사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산업의 변화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면서 국내 기업들도 GE처럼 변하지 않으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경영 환경에 놓였다.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게’ 해준 사업만 고집하면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주도의 소프트웨어 혁명이 벌어지는 글로벌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 최근에는 제조업 현장에서 소프트웨어 혁명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이 한창이라 변화가 필수가 됐다.
우리 기업들은 지금까지 축적해온 제조 기반을 활용해 미래 산업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특히 전자 업계는 요즘 중장기 전략의 초점을 자율주행차와 전기차 등 스마트카 시대에 맞추고 있다. 스마트카 시대에 단순 이동 수단을 넘어 엔터테인먼트까지 제공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자동차를 만들 수 있도록 완성차 업체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핵심 도구는 인수합병(M&A)이다.
삼성전자가 9조원을 들여 세계적인 전장 기업 하만을 인수한 것은 포트폴리오 전환의 신호탄으로 읽힌다. 9조원 규모의 M&A는 국내 기업의 해외 기업 경영권 인수 M&A로는 역대 최대다. 하만 인수로 삼성전자는 단숨에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을 고객사로 끌어들이게 됐다. 삼성전자는 하만과 같은 전장 사업 글로벌 기업들을 M&A 리스트에 올려놓고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최근 세계 최초로 성공한 차량용 128GB eUFS(내장형 UFS) 양산은 M&A가 아닌 내부 핵심 역량을 전장 사업에 맞춘 대표적인 사례다. eUFS는 삼성전자가 프리미엄 스마트폰에 탑재하기 위해 2015년부터 만들고 있는 낸드플래시 메모리의 차세대 메모리 규격이다. 삼성전자의 차량용 eUFS 양산 돌입은 스마트폰에 공급하던 메모리 반도체를 차량용으로도 확대하면서 ‘전장 기업’으로의 변신을 시도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면 다른 기업들에 비해 실패에 따른 리스크를 그만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LG 역시 전장 부품 사업을 빠르게 키우며 스마트카 시장 확대 흐름에 맞춰 사업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LG전자는 VC사업본부를 통해 전기차 등 스마트카에 들어가는 주요 부품을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고 있다. 전자뿐 아니라 디스플레이와 이노텍·화학 등 계열사들도 기존에 스마트폰과 가전 등에 집중돼 있던 포트폴리오를 차량으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옛 ‘금성사’가 떠오르는 가전 기업이 아닌 자동차 부품 회사로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과정이다. 오스트리아의 차량용 조명 업체 ZKW를 약 1조원을 들여 인수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LG전자는 역대 최대 규모인 ZKW 인수를 위해 수년 전부터 공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존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투자나 M&A뿐 아니라 사업 다각화와 신성장동력 확보 차원에서 새로운 분야에 투자해보려는 기업들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도 세계 최대 네트워크 업체인 시스코와 손잡고 커넥티드카 공동 개발을 추진하는 등 지금까지와는 연관성이 낮았던 기업들과 제휴해 새로운 사업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술 중심의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해온 우리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한다. 촘촘하게 구축돼 있는 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와 누적된 제조업 노하우가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흔히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지녔고 ‘커넥트(connect)’의 핵심 기기인 스마트폰 사업에서도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면서 “소프트웨어 역량을 보완한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