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정부군이 16일(현지시간) 쿠르드족자치정부(KRG)가 점령하고 있던 북동부 키르쿠크 유전지대를 장악하면서 이라크·쿠르드족 간 갈등이 중동의 새로운 화약고로 부상하고 있다. 이라크는 KRG의 분리독립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군사행동을 감행했지만 속내는 하루 60만배럴에 가까운 원유가 쏟아지는 유전지대의 경제적 가치를 탐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동 분쟁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미국은 양측 충돌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한발 물러서 있지만 ‘불량국가’ 이란의 영향력 확대와 원유시장의 불안을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딜레마에 처했다.
중동 매체 알자지라 등에 따르면 이날 이라크 정부는 정예부대를 앞세워 키르쿠크주의 주도 키르쿠크시의 군기지·공항 등 거점시설을 장악했다. 이라크 정부는 이번 공격이 지난달 25일 주민투표 이후 분리독립 움직임을 이어온 KRG를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이데르 알아바디 이라크 총리는 이날 성명에서 “전체 국민에게 봉사하고 통합을 유지하라는 헌법상 임무를 완수하고 있다”며 “(쿠르드 지도부는) 이슬람국가(IS)의 위협이 여전한데도 일방적 분리·독립투표로 이라크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KRG의 독립 꿈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일각에서는 이라크가 새로운 내전에 돌입하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라크 북동부 유전지대가 있는 키르쿠크주는 KRG의 자치권이 공인된 곳이 아니다. 하지만 KRG의 군조직 페슈메르가는 지난 2014년 이 지역에서 극단주의 무장세력 IS를 몰아내고 3년간 실권을 행사해왔으며 이라크 정부도 IS의 진격을 막기 위해 KRG의 유전지대 장악을 용인해왔다.
하지만 미국 주도 국제연합군의 IS 수도 락까 탈환이 초읽기에 들어가는 등 IS 격퇴가 끝을 향해 달려가자 ‘어제의 동지’ 이라크 정부군과 KRG 간 충돌이 본격화했다. 총 원유 매장량이 450억배럴 규모로 추정되는 키르쿠크주는 독립 이후 안정적 경제기반을 원하는 쿠르드족과 재건을 위한 재원이 필요한 이라크 정부 모두 탐내는 곳이다. 하루 60만배럴에 이르는 이 지역의 원유 생산량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인 카타르·에콰도르와 맞먹는 수준이다.
중동 주변국들은 이권을 위해 하나같이 이라크 편을 들고 있다. KRG의 분리독립 시도가 자국 내 쿠르드족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는 터키는 국경폐쇄와 송유관 차단 조치를 거론하며 쿠르드 압박에 나섰다. 이라크 내 영향력 확대를 원하는 ‘중도 시아파 맹주’ 이란도 시아파민병대(PMU)를 후원하며 시아파가 정권을 잡은 이라크 정부군을 돕고 있다.
다만 IS 격퇴와 이란 견제를 위해 중동 정세에 날을 세우고 있는 미국은 이라크 정부와 쿠르드족 간 충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동안 미군은 IS에 맞서기 위해 양측 모두에 무기와 군사훈련을 지원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오랜 세월 쿠르드와 매우 좋은 관계를 이어왔으며 또 이라크 편에 서 있었다”며 “그러나 이 전투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믿을 만한 우군이던 KRG의 몰락이 이란과 IS 잔여세력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 미국이 이번 사태를 계속 방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미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포린폴리시(FP)에 “이 지역 긴장 고조의 가장 큰 수혜자는 IS와 이란혁명수비대(IRGC)”라며 “이는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결과”라고 말했다.
한편 국제유가는 중동 정세 불안의 여파로 상승 곡선을 그렸다. 이날 뉴욕상품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11월 인도분은 전 거래일보다 0.8% 오른 배럴당 51.87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두바이유 현물가격도 0.79% 상승한 배럴당 55.97달러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