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LG전자의 실적발표 직후 열린 컨퍼런스콜. 세탁기에 대한 미국의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공세와 관련한 질의가 쏟아졌다. LG전자는 “미국 테네시주에 짓고 있는 세탁기 공장 가동을 앞당겨 물량 공백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전체 물량의 80%가량이 세이프가드 사정권에 있는 점을 의식한 발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LG로서는 통상마찰에 따른 피해를 줄이거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카드로 해외 공장을 활용하겠다는 심산을 드러낸 셈이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글로벌 기업이라면 잠재고객과 협력업체가 밀집돼 있는 곳 인근에 공장을 만드는 게 여러모로 낫다”며 “여기에 해외 현지에서 제품을 생산해 팔면 관세 부과를 피하고 불필요한 통상분쟁도 막을 수 있어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제조의 린치핀은 이미 해외로…봇물 터지는 공장 건설 붐=가전 업종은 생산 축이 해외로 넘어갔다. TV의 경우 해외생산 비중이 97.3%(2016년 기준,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이고 휴대폰(93%)·냉장고(80.7%)·세탁기(79.1%) 등도 절반을 훌쩍 웃돈다. 2008년만 해도 TV(87.3%)를 빼면 해외생산 비중이 모두 50~60%에 불과했던 품목들이다. 한 전자 업체 임원은 “삼성이 사우스캐롤라이나에 3억8,000만달러를 들여 가전 공장을 짓고 LG가 세탁기 공장 외에 미시간에 전기차 부품 공장, 뉴저지에 신사옥을 짓는 데는 그만 한 이유가 있다”며 “삼성만 해도 해외매출 비중이 90%에 이른다”고 말했다.
다른 업종도 비슷한 패턴이다. 아예 해외 생산 거점이 없던 디스플레이와 석유화학제품은 이제 15% 정도의 물량을 밖에서 만들고 철강(1.2%→7.7%), 자동차(27.6%→52.4%)도 몰라보게 해외 의존이 커졌다. 사실 이런 추세는 글로벌 기업에 숙명과도 같다. 현지 협력업체와 밀착경영, 인재 수혈, 물류비 절감 등에서 해외 생산 거점 마련은 필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단순 인건비 절감 차원에서 중국·동남아 등에 발을 들이는 기업이 대다수였다면 최근에는 전기차 등 신산업 공략을 위한 구미 진출이 많은 점도 눈에 띈다. 배터리 공장을 유럽에 짓거나 물색 중인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 비즈니스 환경이 갈수록 나빠져 탈한국이라는 대세를 거스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지적했다.
◇통상압력과 규제 피하기 위한 포석도=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다자무역체제 후퇴, 미국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 지난해부터 이어진 일련의 무역보호주의 흐름은 일자리 문제와 얽혀 있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국제무역이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일자리도 빼앗아가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만연해 있다는 얘기다.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해외에 공장을 만들어 고용을 일으키면 이런 부담을 비껴갈 수 있다. 국내 기업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 중에 미국에 19조원(173억달러)을 투자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국내의 기업 옥죄기는 도를 넘고 있다. 이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극명해진다. 한 재계 임원은 “미국의 경우 각 주마다 공장 유치를 위해 전쟁에 가까울 정도로 러브콜을 보낸다”며 “세제 감면은 기본이고 기업의 인재 확보를 위해 대학과 연구소를 연결해주는가 하면 전력과 용수 혜택도 덤으로 준다”고 귀띔했다. 그는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 협의 과정 없는 근로시간 단축 등 폭탄규제에 법인세까지 올리는 국내와는 너무 대조적”이라고 꼬집었다.
◇법인세 인상 등 관련 법안 시행도 촉각=이러다 보니 기업들은 국회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과세표준 2,000억원 초과 기업에 대한 법인세 인상(3%포인트), 설비 및 연구개발(R&D) 투자에 대한 세제혜택 감면 축소 등을 담은 세제 개편안 통과가 초미의 관심이다. 법안 통과가 이미 본격화되고 있는 기업의 탈한국을 부추기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국회 통과 등을 거쳐 (법안이) 확정된다면 세 부담이 늘어난 기업을 중심으로 법인세율이 낮은 해외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거나, 아니면 기업 분할에 나서거나, 해외에 생산설비를 늘리는 시도가 많아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