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1997 환란...그후 20년]"文정부 경제운용 큰 그림 안보여...따로 노는 '네바퀴론' 손봐야

릴레이 인터뷰-외환위기 산증인 박 영 철 고려대 석좌교수

경제정책 확신 못주면 위기 닥쳤을때 대처 불가능

盧정부 때처럼 성장유망산업 선정 집중육성 필요

대기업 과오만 지적 말고 투자·고용확대 등 유도를

기업투자 위축·서비스산업 후진성 20년째 그대로

정부·정치권 비전 제시하고 젊은이들에 희망 줘야

박영철 고려대 국제학부 석좌교수 인터뷰./송은석기자박영철 고려대 국제학부 석좌교수 인터뷰./송은석기자


박영철 고려대 석좌교수는 지난 1997년 외환위기의 산 증인이다. 외환위기 가능성을 7개월 전에 경고했고 위기가 터진 뒤에는 구제금융 협상을 막후 지휘했다. 이후에도 그랬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청와대 경제수석,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한국은행법 태스크포스(TF) 위원장 등을 맡으며 요동치는 한국 경제의 중심에서 수차례 위기극복을 도왔다. 서울경제신문은 박 교수를 고려대 사무실에서 만나 ‘환란 20년이 남긴 것’을 주제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한국 경제에 대한 혜안을 들어봤다.

박 교수는 “문재인 정부 경제운영의 틀이 안 보인다”고 현재를 진단하면서 그의 생각을 가감 없이 밝혔다. “1997년 우리는 경제정책의 방향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왈가왈부하다가 외환위기에 휩쓸렸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똑같은 문제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정부가 하루빨리 경제운영의 종합적 그림을 제시하고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환란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위기대처 능력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소득주도 성장, 일자리 창출, 혁신성장, 공정경제까지 네 바퀴 자동차를 몰겠다는 것인데 이들이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는 문제를 어떻게 조정할지에 대한 큰 그림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책목표들 간의 연관성과 일관성,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보여주고 정부 정책에 대한 확신을 주지 않으면 앞으로 또 위기가 닥쳤을 때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며 “정부는 물론 기업과 금융기관·가계, 그리고 외국 투자가들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직전 우리 경제가 겪고 있던 문제와 비슷하다고도 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먼저 무너뜨린 외환위기가 암운을 드리우는 상황에서 경제정책의 방향을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환율정책이 대표적이다. 우리 정부와 경제 전문가들은 고평가된 원화 가치 하락을 용인할지를 두고 1996년 말부터 여러 차례 논의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외환위기를 맞았다. 박 교수는 “환율 방어, 금융시장 개방, 기업 구조조정 등을 두고 왈가왈부하다 어떻게 할지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와중에 변을 당한 것”이라며 “국민들이 준비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가 정부의 효율적인 정책조정과 뚜렷한 정책방향 제시를 강조하는 이유다. 동시에 지금 우리 정부가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고 우려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새 정부의 성장정책인 ‘네 바퀴론’에 대해 그는 “상충한다”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여러 가지 좋은 목표들은 많이 제시했지만 그것들이 상호보완적이지 못하다”고 말했다. 소득주도 성장을 위해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면 일자리 창출이 삐걱거리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공 부문 고용을 늘리면 혁신성장이 덜컹거린다. 이제 혁신성장에도 힘을 싣겠다지만 구체적인 청사진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보수정권 10년의 반작용으로 친노동정책이 힘을 받으면서 혁신성장에 필수적인 노동 유연성과 생산성 제고는 뒷전이 되고 사회 전체적인 반기업 정서에 기업 투자도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박 교수는 “여러 경제적 목표들이 어떻게 연계돼 있는지 전체적인 틀도, 구체적인 계획도 안 보인다”며 “기업은 기업대로 임금 비용이 늘어난다고 불평하고 가계는 가계대로 소득이 오르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불확실한 상태가 계속되면 위기 대응 능력과 전략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실제로 기업부채가 급속도로 불어난 중국을 시작으로 세계 경제가 또 한 차례 큰 금융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경고도 이어지는 상황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중국의 총부채는 2008년 국내총생산(GDP)의 162%에서 2016년 260%로 늘었다. 오는 2021년에는 320%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다. 박 교수는 “앞으로 2년 내 중국을 진원지로 세계 경제가 또 한번 금융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며 “중국발 위기가 정말 발생하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나라 중 하나가 우리나라”라고 우려했다. 중국은 우리나라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인 만큼 중국 경제가 흔들리면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충격이 불가피하다. 그는 “지금처럼 대외적인 위기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결국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한국은 준비가 안 돼 있다”며 “하루빨리 정책목표들 간의 합리성을 정비해 정부가 어떤 정책으로 성장과 안정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을지 대내외 경제주체들에게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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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박 교수는 다른 3개에 비해 바퀴가 작은 ‘혁신성장’을 제대로 하려면 기업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산업정책을 새로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 한국이 처한 근본적인 문제는 외환위기 이후 지난 20년간 기업의 투자 의욕이 상당히 위축됐다는 것”이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노무현 정부 때처럼 정부와 기업이 힘을 합해 성장유망산업을 함께 선정해 집중 투자하는 정책을 다시 시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출범 후 17일 만에 윤진식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이 5대 경제단체와 만나 신성장동력 발굴과 기업 규제개혁을 공동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어 4월 초 민간과 함께 ‘차세대성장산업발굴기획단’을 구성하고 10대 성장동력산업을 선정, 민관합동투자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세웠다. 이때 선정된 것들이 차세대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미래형 자동차 등 지금 우리나라와 세계 경제를 먹여 살리는 주력산업들이다.

박 교수는 “공정경제 확립은 너무 당연한 목표지만 지금은 ‘재벌을 손보겠다’는 얘기만 나올 뿐 ‘재벌과 어떻게 협력하겠다’는 얘기는 없다”며 “과거 대기업의 과오가 있더라도 투자와 고용·생산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를 바로잡는 방법에 대해 논의와 타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지금은 사회적으로 반기업정서가 팽배한 상황에서 정치권도 적폐청산과 이합집산에 몰두하다 보니 합의가 이뤄질 수 없는 상태”라며 “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면 무엇보다 정치권의 합의도출 능력이 복구돼야 한다”고 했다.

외환위기 이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노사관계도 마찬가지다. 박 교수는 “1998년에 만들어진 노사정위원회는 20년이 되도록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며 “혁신을 저해하는 노동시장 경직화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정부가 바뀔 때마다 노사관계의 무게추가 흔들리면서 노사정 간 대화조차 어려운 상태”라고 쓴소리를 쏟아냈다. 노사정위는 1999년 2월 민주노총이 탈퇴한 데 이어 지난해 한국노총도 노사정협의 파기 선언을 하면서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한 상태다. 박 교수는 “근로조건과 노동시장 제도, 정년 등 사회·정치적 측면에서 합의가 이뤄지면 경제정책도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하게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정치권이 합의를 도출해주지 못하면 상당 기간 해결도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제조업 외 산업들은 여전히 발전이 더디다는 점도 문제다. 박 교수는 특히 “서비스 산업의 후진성과 낮은 생산성은 말 못할 수준”이라며 “이제 서비스 산업도 상당 부분 수출산업으로 진화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과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금융산업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난 20년간 우리나라 GDP 대비 금융자산이 급증하면서 금융 부문이 양적으로는 비대해졌지만 효율성과 생산성은 여전히 낮다”고 꼬집었다.

여전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박 교수가 쓴소리 끝에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희망’이다. “제일 중요한 점은 젊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한 그는 “젊은이들이 소외감·허탈감을 느끼며 한국에서 사는 게 희망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면 나 같은 늙은이와 나라에도 희망이 없다”며 “사회적 합의와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정부와 정치권의 몫”이라고 당부했다. /대담=김영필·빈난새기자 binthere@sedaily.com

빈난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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